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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nsori_Lab is...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

    since 2010

    백범일지를 바탕으로 창작한 새로운 판소리


    임진택 명창이 ‘백범일지’에 바탕한 판소리 사설을 직접 쓰고 작창하여 2010년 왕기석 왕기철 두 명창과 함께 백범김구기념관, 정동극장, 국회 헌정기념관 등지에서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를 선보여 관람객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받은 바 있으며, 2013년 7월에는 하와이에서 열린 미주 한글교육협회 총회 자리에서 판소리 ‘백범 김구’를 완창하여 해외동포들의 고국에 대한 애정과 향수를 한껏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는 백범선생의 선견지명을 고스란히 담아낸 우리시대의 문화 예술로 그 역할과 사명을 맡아하고자 한다.

    동영상으로 감상하기

    1부 빼앗긴 나라 - 청년역정

    1장 : 황해도 아기접주


    아니리 - 이 때는 어느 땐고. 열강의 조선 침탈이 본격화되던 1876년 병자년에 일본의 강압으로 소위 강화도 수호조약이란 것이 체결되었것다. 그 해 7월,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이란 곳에 김순영이란 상민과 곽낙원이란 아낙 사이에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이름이 창암이라. 요놈이 어릴 적부터 못말리는 개구쟁이여.


    단중모리 

        창암 행색 볼작시면 세 살 적에 마마 앓고

        얼굴에는 얽은 자국 군데군데 남았는데

        집안마저 가난하니 늘상 배가 고프구나

    잦은모리

        아버지가 쓰던 숟갈 둘로 탁 분질러서

        동강난 반쪽 숟갈로 엿하고 바꿔 먹다 왼통 야단맞고,

        아버지가 감추어둔 엽전 스무냥을 몽땅 꺼내갖고

        온몸에다가 빙- 둘르고서 떡 사 먹으러 나가다 된통 꾸중듣고,

        여름철 장마비로 작은 내가 흐르는데

        붉은색 푸른염색 모두 꺼내 풀어놓고

        서로 섞이는 구경하다 엄청 혼쭐나고,

        이런 건 약과로다. 이웃집 아이들이 패거리로 떼를 지어

        가만있는 창암이를 이유없이 매질하니, 창암이 분이 나서

        집으로 돌아오더니만 부엌칼 검쳐들고 복수하러 달려간다.

        이웃집 울타리 개구멍으로 살 살 기어갖고 돌격! 하려다 앗불사!

        놈들 외삼촌한테 들켜갖고는 되레 실컷 얻어터지고, 지어

        부엌칼까지 뺏겼으니, 어머니 곽씨가 “아니, 식칼이 대체 어디 가서?

        창암아 너 부엌에 식칼 못 봐서?” 내내 찾는데도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르는체 했던가보더라.


    아니리 - ‘될성 부른 놈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이러한 기질들이 모두 다 겨레의 큰인물이 되려고 그리했던 것이렷다. 뭐라고? 그게 큰인물하고 뭔 상관이 있냐고? 왜 없어? 동강난 반쪽 숟갈로 엿바꿔 먹으면 안된다, 이걸 알았으니 분단을 끝내 반대하신 것이고, 돈 스무냥 정도는 가볍게 알았기 땜시 독립자금 대범하게 사용하신 것이고, 붉은 색 푸른 색이 섞이니까 좋더라, 색깔이념의 다양성을 어릴 적부터 벌써 알았다는 얘기 아녀? 그리고 식칼사건! 일본 천황한테 폭탄 던진 대담한 방략이 다 여기서 나온거다 이 말이여.


    창암이 이렇듯 스스로 경세방략을 깨우칠 제 어느덧 열여덟살이 되었는데, 사방에서 괴이한 이야기들이 분분한즉 삼남에 번지고 있던 동학에 관한 이야기라. “동학을 믿으면 반상 차별없는 새 세상이 펼쳐진다” 하는 말을 듣고는 창암이 대번에 입도를 하는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결심으로 이름을 ‘창수’로 바꿨것다. 창수가 입도를 하자 “김창수란 도인은 공중을 한 길 이상 걸어간다” 하는 소문이 퍼지면서 도인들이 계속 모여드는지라, 김창수 별명이 ‘황해도 아기접주’였것다.


    중중모리

        갑오년(1894) 가을쯤에 경통이 나렸난디

        “각 도마다 자기 연비 명확히 파악하고

        명망있는 도유들로 대표를 선발해서 해월 대도주께 보고하라”

        황해 도유 열다섯명이 육로 거쳐 수로 통해

        충청도 보은군 장안리에 도착하니

        집집마다 도인들이 가득가득 들어찼다. 주문을 외우난디,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영세불망만사지”

        한참을 기다린 후 선생 처소에 들어가니

        수염 기른 어떤 노인, 맑고 여윈 얼굴로

        허리 굽혀 손을 짚고 맞절을 하시는데

        이 분이 바로 해월 최시형 대도주라.

        손병희와 김연국이 좌우로 옹위하여

        황해 지역 연비 명단 세세히 확인할 제

        그때여 도인 하나 급히 뛰어 들어와서   

        “남접의 전봉준이 벌써 병사 일으켰소

        왜군들이 무장하여 동학군을 토벌한다 하오”

        해월선생 진노하야 좌우에 지시하되

        “호랑이가 물러 오면 가만 앉아서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우자”

        이 말은 바로 전 동학교도들에 대한 총동원령이라!


    휘모리

        각지에서 몰려와서 대령하던 접주들이 물끓듯이 밀려간다

        창수 일행 첩지받고 황해도로 돌아와서

        접주회의 바로 열어 거사키로 결정한다.

        경군은 물론이요 왜병까지 올 것이니 무기부터 확보할제

        산포수가 제 격이라. 포수부대 편성하여 팔봉산에 집결--!

        ‘척 왜 척 양’ 크게 써서 깃발- 내걸으니 팔봉도소 이 아니냐


    아니리 - 그때여 신천 청계동 사는 안태훈이라는 이로부터 밀사가 왔거날, 안진사는 동학 토벌에 나선 양반재사임에도 창수의 인물됨을 아껴 “서로 치지 말자” 하는 밀약을 해온거지. 갑오년 섣달, 경군과 왜병이 호남의 동학을 완전 도륙하고 황해도까지 샅샅이 훑어오니, 창수가 화를 피해 청계동 안진사를 찾아갔것다. 이 안진사 맏아들이 누군고 하니 안중근이여. 당년 열여섯으로 상투를 틀었고(상투를 틀었단 말은 장가를 갔다 이말이여) 날마다 사냥을 다니는데, 나는 새를 맞추고 달리는 짐승을 대번에 거꾸러뜨리는 재주가 있었거든. 그 안중근이하고 그 때 만난 것이여.


    안진사 사랑에 웬 검소한 노인 한 분이 들르는데 고능선이란 산림학자라. 고선생이 창수보고 “앞으로 나와 함께 세상사도 논하고 학문도 토론함이 어떻겠나” 창수가 황공하여 “높으신 덕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엄히 채찍질 하여 주십시오.”


    진양조

        인적이 고요한 어느 날 밤, 고선생이 비감하여 하는 말이

        “나라가 망하는 데도 두 가지 길이 있다.

        백성들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죽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백성들이 갈라져서 한편은 여기 붙고 한편은 저기 붙어

        서로 찢고 다투다가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 한가지 일 뿐이라.”

        창수가 이 말 듣고 비분을 못 이기어 “선생님,

        시국이 그럴진대 망해가는 이 나라를 붙들 방법은 없나니까?”


    창조

        득수반지무족기(得樹攀枝無足奇)허나 현애살수장부아(縣崖撒手丈夫兒)라

        가지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 끝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이니라.



    2장 : 나라의 치욕을 씻어보리라


    아니리 - 이때는 어느 땐고, 을미년(1895) 8월 왜놈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였은즉 김창수가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적에, 해를 넘겨 병신년이라. 추운 겨울날, 창수가 안악군 치하포 어느 여각에 묵게 되었지. 아침밥을 먹으려는데 웬 단발을 한 수상한 자가 있는디, 두루마기 밑으로 왜놈 칼집이 보인단 말이여. “저 놈이 장사치 같으면 굳이 조선사람으로 위장하지 않아도 될 터, 그렇다면 저 자가 국모를 시해한 ‘미우라’라는 놈이 아닐까? 내 저 한 놈을 죽여서라도 나라의 치욕을 씻어보리라.” 이리 생각하니 자못 가슴이 울렁거리고 심신이 혼란하거든.


    잦은모리

        “네가 과연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정당한가?” “그렇다.”

        “네가 과연 이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그렇다.”

        김창수가 마음 속에 혼자 묻고 다짐하며

        사즉생 생즉사로 죽을 작정 하고 나니

        잡생각은 사라지고 머릿속이 환히 밝아오는구나.

        밥상 받은 김창수, 밥 한그릇을 훌떡 먹어치우고는

        “여보 주인! 내가 오늘 700여리 산길을 쳐야할데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하니 일곱상만 더 차려오오.”

        주인장이 어이없어 투덜대고 들어가며 “젊은 사람이 돌았구먼”

        김창수 드러누워 동정을 살피는데,

        어떤 이는 김창수를 미친 놈으로 취급하고

        어떤 이는 그와 달리 호기심으로 기대할제,

        이때여 그 왜놈이 식사를 다 마쳤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서 댓돌 아래로 내려서는구나.


    엇모리

        김창수 거동 봐라 김창수 거동 봐

        돌연 몸을 일으키더니 문 밖으로 뛰쳐나가며

        “너 이놈 원수놈아 나의 손에 죽어봐라”

        발길질로 냅다 찬 후 땅바닥에다 꼬나박으니

        숙객들이 놀래어서 방문 열고 내다볼제, 창수가 소리친다.

        “누구든 이 왜놈을 편을 들어 나서는 자는, 가만두지 않가서.”

        이때여 왜놈봐라. 재빨리 몸을 빼내어 딩구르르 구르더니

        환도를 얼른 빼어들고 살기등등 달려든다

        김창수 잽싸게 요리조리 피하면서

        “이-크 에-크, 이-크 에크 이크에크.”

        활개짓으로 긁어누르더니 순식-간에 발길질로 턱주가리를 팍!

        환도 잡은 손목아지를 힘껏 틀어 팽개치니

        커다란 환도가 댕강 나동그라진다.

        김창수 기세봐라- 칼을 집어 그 왜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도질을 해버리니

        빙판 마당 한가운데 피가 철철 흐르는구나

        김창수 두 손으로 왜놈의 피를 덥북- 움-켜 마시더니

        “의병 김창수가 조선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


    아니리 - 그 자의 정체를 확인한즉 ‘쓰치다’ 라는 왜놈 육군 중위라. 그놈이 지녔던 엽전 800냥은 모두 동네 가난한 집에 나눠주게 하고, 주인장을 불러 “필구를 가져오라.” “예예.” ‘국모 보수(報讐)의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이노라.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 담벼락에 방(榜)을 크게 써붙여놓고 집으로 돌아와 태연하게 지냈것다.


    그러던 어느날 꼭두새벽, 수십명 순검들이 우루루루 들이닥치더니 창수를 쇠사슬로 꽁꽁 묶어갖고 인천 감영으로 압송을 했지. 창수가 감옥에서 장질부사에 걸려갖고 산 송장이 다 돼서 경무청에 가 취조를 받는데, 간수한테 업혀서 갔다고 하드라. “네가 안악 치하포에서 일인을 살해한 일이 있느냐?” “그렇소.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구 한명을 때려죽인 일이 있소.” 경무관이 놀라 눈을 똥그랗게 뜨고 쳐다보는데, 옆에 지켜보던 왜놈순사 와타나베라는 놈이 눈망울을 굴리면서 “난데스까? 난데스까?” 끼어든단 말이여. 다 죽어가던 창수가 분기하여 호통을 치는데,


    단중모리

        “너 이놈 왜놈은 말 듣거라!

        만국 공법이니 국제 공법 그 어디에

        국가간의 통상 화친, 조약을 체결한 후

        그 나라 국모를 시해하라는 조항이 있더냐

        야 이 짐승만도 못한 왜놈아!

        내가 살면 사는대로,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라도,

        너희 놈들 천황이라는 자를 당장에 쳐죽이고

        왜놈 씨를 말려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호령하니

        겁이 난 왜놈순사 와타나베란 놈이 “칙쇼우! 칙쇼우(畜生)!”

        욕을 하며 뒷문으로 도망을 치는구나.


    아니리 - 재판부는 김창수에게 강도 살인죄를 적용해서 사형 판결을 내렸것다.


    창수가 “에라, 죽을 때 죽더라도 글이나 실컷 보리라.” 태서신서 세계지지같은 신서적들을 열심히 읽는데, 하루는 신문에 “오늘 날짜로 살인강도 김창수를 교수형에 처한다.” 하는 기사가 났거날, 창수 태연하게 평상시처럼 책을 읽으며 교수대에 오를 시간을 기다릴 제, 이날도 감옥 밖에서는 어머님이 오셨다가, 아들 죽는 줄도 모르고 음식을 넣어놓고 가셨구나. 시각은 자꾸 흘러 삼경이 되어갈 제,


    중중모리

        이때여 사람들 발자국 소리, 옥문이 덜커덩 열리더니

        “김창수 어느 방에 있소?”

        죄수들 모두 깜짝 놀래 머리가 쭈삣, 오금이 바싹,

        안색은 창백, 숨도 못 쉬고, 손에 땀을 쥐고 있을 적에

        감리서 직원이 외친다.

        “김창수는 이제 살았소. 대군주 폐하께서 직접 전화를 거시어

        사형을 정지하라는 친칙(親勅)을 내리셨소.”

        죄수들이 이 말 듣고 “김창수는 참말로 이인(異人)이요.”

        “저 사람은 절대 안 죽을 줄 내 진작에 알았다니까...”

        발목에 차고 있던 차꼬(着錮)를 북삼아서

        장단 맞춰 마구 두둘겨대며 얼씨구나--- 지화자 좋다.

        온갖 노래에 춤도 추고 밤새 맘--껏 잘- 놀았다더라.


    아니리 - 김창수가 어찌 살아났는고 하면, 고종황제가 계하죄인 최종 결제를 하다 ‘국모보수(國母報讐)’ 사형수를 발견하고 급히 전화로 집행을 정지시킨 것이라. 더욱 기적인 것은 경성 인천간 전화가 가설된 것이 불과 사흘 전이여.


    이렇듯 천우신조로 사형은 면했는데, 이때 감옥 밖에서는 강화에 사는 김주경이란 이가 창수를 꺼내려고 무진 애를 쓰다가 뜻대로 잘 안되자 편지 한통을 보낸 바, 단율(單律) 한 수가 들어있거날,

    탈롱진호조(脫籠眞好鳥)요 발호개상린(拔扈豈常鱗)이라.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정 잘 나는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정녕 힘찬 물고기라. 탈옥을 권한 편지로구나.


    잦은모리

        김창수가 그날부터 탈옥할 것을 결심하고

        공모에 가담할 자 비밀리에 규합한다.

        면회 오신 아버지께 살짝 부탁하여 한 자 길이 삼릉 쇠창

        의복속에 감추어서 몰래 차입 하여놓니 오늘이 거사일이라.

        당직간수 불러다가 엽전 100냥 내어주며

        “오늘 밤은 김창수가 턱을 한번 낼 터이니

        거 모주도 몇 통 사서 맘껏 들게 하라우요”

        아편 값까지 쥐어주자 간수가 생색내어

        잔치판을 벌여주니 모두들 살판 났구나

        실컷 먹고 마셔놓니 취흥이 도도하여

        고함도 치고 싸움도 하고 연설도 하고 욕설도 하고

        연설인지 욕설인지 지랄 별짓 다할 적에

        김창수 거동봐라, 삼릉창 감춰 들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저 방에서 이 방으로

        잔치 구경하는 척 은근히 배회하며 동정을 살피는구나


    휘모리

        김창수 거동봐라 김창수 거동 봐

        구석방 살짝 들어 벽쪽으로 바싹 붙어

        마룻장 뜯어내고 땅바닥을 계속 파니 구멍이 크게 뚫려난다.

        공모자들 눈짓하여 한 명씩 밀어넣니

        모두들 웅크리고 엉금엉금 기나갈제

        김창수 마지막에 뒤따라 나가보니

        먼저 나간 녀석들이 담 밑에 앉아 벌 벌 벌 떨고 있는지라

        김창수 독촉하여 한명씩 밀어올려--

        담 밖으로 내보내고 이제 창수 넘을 차례인데

        호르르르륵! 앗뿔사, 파수 순검이 눈치를 챘구나.

        호르르르륵... 호각소리 요란하며, 탈옥이다! 비상!

        다급해진 김창수, 다급해진 김창수

        범 같이 몸을 날려 담 꼭대기로 펄—쩍! 뛰어올라 훌—쩍!

        뛰어내리더니마는 후다다다다닥...

        삼문 앞으로 당당히 빠져나왔다더라---.



    3장 : 새로운 독립정부를 세우리라


    아니리 - 탈옥에 성공한 김창수는 유랑길을 나서 삼남을 두루 둘러본 후,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생활도 해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듬해 강화 은인 김주경을 찾아갔다가 그들 권유로 이름을 구(거북龜)로 고쳤것다. 그 해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이후 김구는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바, 때마침 신천 예수교회에서 여학생 최준례를 만나 혼례를 치르게 되니, 김구 나이 29세요, 최준례는 18세라.


    이때는 어느 땐고. 을사년(1905)에 늑약이 체결되니, 어떤 이는 비분강개 자결하고 어떤 이는 의병을 일으킬제, 김구는 대한문 앞에서 을사늑약 폐기 상소투쟁을 벌여보나 왜놈들 무력 진압에 강제 해산되고 말았구나.


    평중모리

        김구선생 그 시부터 애국 계몽 교육사업에 정진한다.

        서명의숙 교사로 해서 양산학교 교사 거쳐, 안악에서 처음으로

        사범 강습회를 개최한즉, 소학교 교사는 물론이요

        서당 훈장들까지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루는구나.

        교육 구국 계몽운동 나날이 발전할 제, 김구선생 거동보소

        해서 교육총회 발족하여 학무총감 맡아있고

        황해도 전 도내에 학교를 설립코자 각 군읍을 순행하며

        환등회를 개최할제, 배천에서 재령으로, 장연에서 송화로

        인근의 양반 상민 다 모아놓고 열변을 토하는구나.

        “여기 모인 양반들, 충신의 자손이니 공신의 후예니

        자부하던 그 기염(氣焰) 다 어디 갔소.

        여기 모인 상민들아, 상놈도 이제 차별없이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새세상을 만드세

        양반도 깨어나라, 상놈도 깨어나라.”


    아니리 - 그러던 어느날, 1909년이었던가 보더라. 돌연 왜놈 순사가 나타나 환등회를 해산시키고 김구를 연행해간즉, 알고보니 왜놈 통감 이토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한인 은치안한테 피살되었다는거라. 은치안이 누군고 하니 바로 안응칠, 바로 안중근이라. 김구가 안중근 거사에는 혐의가 없어 일단 풀려났으나, 오호 통재라. 경술년(1910)에 한일합병의 치욕을 당했구나. 그러던중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이 왜적 도살 계획을 세웠다 발각되는 바람에 김구도 또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되었는데, 앗불사! 경무총감부 기밀과장이 바로 와타나베란 놈 아닌가? 17년전 치하포 사건 때 인천 경무청서 마주쳐서 “칙쇼우 칙쇼우” 하면서 도망친 그놈 말이여. 이놈이 여전히 눈망울을 굴리면서, “김가메, 와따구시 가슴에는 X노 광선을 대고 있어 너의노 행적을 환하게 투시하고 있다.” 김구가 탈옥 사실이 발각되면 큰일인지라 조마조마 할제(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 쫓아다니던 그 경시관 얘기하고 비슷하당게), 다행히 와타나베란 놈 X광선이 고장이 났는지 김구가 김창수인줄은 눈치채지 못하고 안명근과의 관련만 계속 추궁을 하다 드디어 포악을 드러내는데, “빠가야로!”


    엇모리

        빠가야로 빠가야로 ----- -----

        순사들이 달려들어 김구의 수족을 결박터니

        천장에다가 달아매고는 고문을 자행하는구나.

        몽둥이로 마구 패고 채찍으로 난타하고

        손가락에다 능목을 끼어 지긋이 눌러대고,

        화로에다 쇠막대기를 벌겋게 달구어서 온몸을 마구 지지대며,

        “빠-가-야-로-! 안명근이와 공작하여

        신임 총독각하 암살이노 계획이하고

        부자들 협박이해서 강도질이노 한 사실, 모조리 실토하란 말이야.”

        콧구멍에다 주전자로 물을 콸 콸 계-속 붓어놓니

        김구가 정신잃고 허우적거리다가

        온몸이 축 늘어지면서 그만 기절을 하는구나


    아니리 - 밤을 꼬박 새면서 고문을 하는데, 이런 가혹한 고문을 일곱 차례나 받았으니 그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요(소리로도 표현이 쉽질 않어).

    석달 후 판결이 있었는데, 안명근은 종신징역이요 김구는 15년형에 보안법 추가로 도합 17년이라. 서대문 감옥에 갇혀놓니 “허허, 이제 세상나갈 희망은 전연 없고 꼼짝없이 감옥귀신이 되었구나.” 김구가 두고온 가족 생각에 잠을 설칠 적에(그 아내가 있고 딸이 하나 있었단 말이여), 어느 날 어머님이 면회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창수야, 나는 네가 경기감사 한 것보담 더 기쁘구나야. 우리 걱정일랑 말고 네 몸 보중이나 잘 하라우.” 김구가 기가 막혀, 가는 모친을 우두머니 바라보며, 끓어오르는 울분을 속으로만 삼키는구나.


    당시 일제하 감옥에서는 고두례(叩頭禮)라고 해서 식사 때마다 천황에게 머리를 땅에 박는 절을 시켰는데, 그 때마다 우리 조선 수인들이 뭐라 자꾸 중얼거린단 말이여. “뭘 그리 중얼거리쇼?” 한 젊은이 하는 말이 “천황이 뒈지면 대사면이 내리게 돼있다오. 그래서 ‘메이지(明治)란 놈 제발 즉사시켜 줍소서’ 비는거요.”(이 사람이, 이 젊은이가 후에 청산리전투로 이름을 날린 김좌진이라는 설이 있지.) 김구도 매일 세 번 천황 즉사를 기원하며 감옥생활을 견딜 적에,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루는 형무소장이 천황 사망소식을 알린 뒤 대사면이 선포되더니 몇달 뒤 그 여편네가 따라갔다면서 또 감형이 되니, 남은 형기가 불과 2년이라. 김구가 다시 세상에 나가 활동할 신념이 생겨나는데,


    진양조

        “이제 다시 세상에 나가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우선 왜의 민적부터 벗어버리고,

        백정 범부들까지도 모두 차별없는

        새롭은 독립정부를 세우리라”

        김구가 결심하고 이름을 고치는데

        거북구(龜)자를 아홉구(九)자로 바꾸고, 별호를 정하거날

        흰 백(白)자 무릇 범(凡)자 백범(白凡)이로구나

        백범 김구 남은 기간 복역 중에

        뜰을 쓸고 창을 닦으며 기도할제

        “하나님, 왜놈을 몰아내고 우리나라 독립정부 세우거든

        백범 김구는 기꺼이 그 집의 문지기라도 될 것이니

        그 날이 꼭- 오는 것을 보고 죽게 하소서”

        두 손 모아 간절히 비는구나.


    아니리 - 이 후 김구는 인천 감옥으로 이감하여 인천항 축항공사에 동원되었다가 가석방(假釋放)되었것다.


    이때가 1915년, 김구 나이 40세라. 조선천지는 일제의 무단통치로 완전 암흑과 공포의 사회로 변했는데, 세계정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로서아는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은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하니 약소민족 해방독립운동이 크게 고무될 제, 1919년 기미년이라. 일본에 유학가있던 조선 청년 학생들이 앞장서 독립 선언을 계획하니, 국내에서도 천도교의 손병희,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 등이 뜻을 함께 모을 적에, 그때 마침 고종황제가 붕어하신지라, 독살 의혹이 증폭되고 민심이 크게 동요하더니,


    잦은모리

        3월 1일 정오 기해 만세운동 개시한다.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 회합하여 독립선언서 낭독하고

        만세를 제창한 후 일제 관헌에 피포(被捕)된다.

        이때여 종로 탑골공원에 조선사람 집결할 제

        수만명 시민 학생이 구름같이 모여든다.

        한 청년 단에 올라 선언서를 낭독하는데,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조선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펼쳐들고 만세 만세 외칠 적에

        온통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구나.

        만세 물결 전-국 방방곡곡으로 파급될제

        학생들은 휴교하고 노동자는 파업하고

        상인들은 철시하고 관리들은 사표 내고

        농민들은 장날을 기해

        횃불 시위에 산상 봉화시위까지 벌이는구나

        만세운동 소식 들은 해외의 동포들도

        만주와 연해주 미주 하와이 에서들 동참하니

        대한국 전 국민이 거족적으로 일어났구나.


    엇모리

        일제의 만행 보소 일본놈 만행 보소.

        조선민족 반일 봉기 무력으로 제압할 제

        일본 본토 병력까지 대규모로 동원,

        잔인한 유혈 학살 무자비하게 자행한다.

        만세 외치는 조선사람 무차별로 난사하고

        쫒기어 도망치는 사람 대검으로 난자하고

        늙은이건 젊은이건, 어른이건 아해건, 남자건 여자건

        무지-막지 살해하니, 일제의 잔인무도한 학살과 탄압으로

        조선 독립만세운동은 무참하게 진압되고 마는구나


    평중모리

        이때여 김구선생, 만세함성 온천지에 진동할 제

        일제 헌병 감시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피신을 꾀하는데,

        안악을 빠져나와 사리원에 도착하여 경의선 기차에 몸을 싣고

        신의주에 겨우 당도한 후 압록강을 넘어 안동현으로 건너가,

        좁쌀장수로 변장하고 일주일을 기다려

        이륭양행 화륜선을 타고 상해로 출발하니

        나흘만에 닿은 곳이 상해 관문 포동 선창이로구나

        이로부터 백범 김구의 망명생활이 시작된다.


    2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1장 : 한인애국단 특무공작

     

    아니리 - 김구가 중국 상해에 도착한 기미년(1919년) 4월, 상해에 모여든 애국지사들이 민주 공화에 바탕한 임시의정원을 조직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것다. 대통령에는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 ․ 외무 ․ 군무 등 각 부서에 총장과 차장을 두어 국무회의를 구성하는데, 때마침 도산 안창호가 내무총장으로 취임한지라, 내무위원의 1인이었던 김구가 안창호에게 청을 하는데,

     

    중머리

    “안창호 총장님, 청이 있소.

    나를 우리 대한민국 정부의 문지기로 시켜주면 어떻겠소?”

        안창호가 정색하며

        “아니 백범, 문지기라니 당치 않소.”

        김구가 다시 청을 한다.

        “나는 감옥에서 백정 범부 되고자 결심한 바라,

        독립정부의 문지기는 평소 나의 소원이요.”

        다음날 아침 안창호가 김구에게 임명장을 내주는데

        뜻밖에도 그 직함이 임시정부 경무국장이라.

        김구가 저어하며

        “어허, 나같은 자격으로 경무국장이라니,

        가당치 아니하오.” 사양하니, 안창호 하는 말이

        “백범같은 용맹한 이가 정부 청사 수호함은

        참으로 적당하니, 사양치 마오.” 강권하는지라

        백범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을 맡는구나.

     

    아니리 - 임시정부 초기에는 모두들 일치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였건만, 세계 사조가 사상이 갈라지고 분파가 생겨놓니 총리 이동휘는 소련으로,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으로 가버린즉, 임시정부가 공백상태라. 그 와중에 김구는 역량을 인정받아 내무총장으로 승진되었것다.

     

    그 무렵 상해에 와있던 부인 최준례가 낙상으로 병이 악화되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최준례 묻엄’이라 하는 순한글 묘비명 사진이 지금까지 전해오거든), 어머니도 독립운동에 방해된다며 손자들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가시니 김구는 홀홀단신이 되었는데, 의정원 이동녕 의장이 뜻밖에 김구를 ‘국무령’에 천거하니, 임시정부가 해체 위기인지라, 마지못해 수락을 하였것다. 혼란은 일단 수습되었으나 재정 형편이 말이 아니라. 청사 전세금도 밀리고, 일국의 국무령이 잠은 정청에서 자고 밥은 동포들 집에서 얻어먹는 형편이라. 당시 김구선생이 제일 많이 신세진 집이 정정화 김의한 부부 집인데, 그 집 어린 아들 이름이 후동이여. 김구선생이 밥상 기다리면서 늘 무릎에 앉혀놓고 얼러줬거든. 그 후동이가 바로 지금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계신 김자동 선생님이시지.

     

    각설하고, 김구는 임시정부 재정문제 타개를 위해 해외동포들에게 ‘편지쓰기’를 시작한 바, 하와이 거주 동포 제씨들로부터 답장이 왔는데,

     

    엇중모리(송서제)

        “김구선생, 당신이

        정부를 지키고 있어 감사히 생각하오.

        당신 생각에는 무슨 일을 하고 싶소?

        우리 민족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우리가 나서 돈을 주선하려 하오.” -----

        김구가 반기허여 은밀히 회답할 제,

        “무슨 사업 하겠다고 밝힐 수는 없으나

        간절히 하고 싶은 어떤 사업 있으니

        조용히 돈을 모아 두었다가

        통지가 가거드면 바로 급히 보내주오.” -----

     

    아니리 - 그 ‘간절히 하고싶은 사업’이 바로 특무공작이라, 극비리에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것다.

     

    이 무렵 김구는 상해 교민단 단장을 겸하였던바, 하루는 중년의 동포 한사람이 교민단을 찾아와 직원들 앞에서 불만을 토로하는데, 왜놈 말이 아주 익숙하고 좀 남다른 사람이라. “당신들은 독립운동 한다면서 일본 천황 하나를 왜 못 죽이는거요?” 떠드는 소리가 문밖까지 흘러나오거날,

     

    세마치

        이날 밤 김구 단장이

        그 사내가 묵고 있는 여관방을 조용히 방문한즉,

        사내가 급히 일어나 맞으며, 무릎 꿇고 결연히 하는 말이

        “저의 이름은 이봉창이고, 제 나이는 31세인데,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그동안 대강 다 누린지라

        이제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해 국사에 헌신하고자 하니

        선생님! 부디 저를 지도하여 주십시오.”

        김구가 이 말 듣고 감동이 벅차올라,

        “내 1년 이내에, 군의 행동을 위한 준비를 해 주겠소.”

        이봉창 흔연히 돌아가서 철공장에서 막일을 하며

        때가 오기만 기다린다.

     

     

    아니리 - 이 때 마침 하와이 애국동포들이 특무공작 지원금으로 1000달러를 보내온즉, 김구가 중국 병공창에 부탁하여 폭탄 두 개를 확보하고 비밀리에 이봉창을 불러 특명을 내리는데, 천황 암살 특명이라. 이봉창,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선서식을 거행할 제, “선서! 나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한다. 대한민국 13년 12월 이봉창!” 찰칵! 기념사진을 찍고, 이봉창은 동경으로 떠났것다.

     

    잦은모리

        1932년 1월 8일이라.

        일본 왕 히로히토가 동경시 교외에 있는

        요요키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친 후

        왕궁으로 돌아올 때 화려한 마차를 탔구나.

        이때여 이봉창은 품속에다가

        폭탄 두개를 몰래 감추고서

        사쿠라다문(櫻田門) 바로 앞에서 일왕 오기를 기다릴제,

        00 따각 따각 따각

        일단의 근위병들이 위세 부리며 나타나더니

        길가는 행인들다려 엎드리라 명하는구나.

        이봉창 태연하게 왜인들 틈에 끼어

        가만히 엎드려 기다릴제,

        떨그럭 떨그럭 떨그럭떨그럭

        일왕이 탄 마차가 떨그럭거리며 다가온다.

        “때는 바로 지금이다”   

        이봉창 거동 봐라, 돌연 뛰쳐 나가면서

        마차 옆구리를 향해 폭탄 두 개를 연속으로 투척한다.

        쾅! 쾅! 폭음소리 요란하니 히히잉!

        말들은 놀라 뛰고 마차는 부서지고

        군중들은 깜짝 놀래 사방으로 피할 적에

        근위병들 당황하여 대경실색을 하는구나

        철혈남아 이봉창!

        도망할 생각 전혀 않고 두 손을 번쩍 쳐들고는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아니리 - 그 날 상해신문 호외에 한인이봉창저격일황불행부중(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幸不中)이라 하는 동경발 기사가 게재된 바, ‘한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하지 못했다’ 하는 것인데, 폭탄 성능이 약했던 것이 결정적인 실패 원인이었다더라.

     

    이봉창 의거 이후 김구의 신변은 더욱 위험에 처하게 된 바, 낮에는 활동을 쉬고 밤에는 동지의 집이나 창기의 집에서 자는 험난한 생활이 이어졌것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젊은이가 김구 있는 데를 조용히 찾아왔는데, 그가 윤봉길이라.

     

    중머리

        윤봉길이 말을 한다.

        “제가 상해에 와서 날마다 야채를 지고

        홍구로 다니는 것은 어떠한 기회를 얻고자 함인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마땅히 죽을 자리를 구하기 어렵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동경사건과 같은 경륜이 있으신즉

        저를 믿고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김구가 크게 감복하여

        “뜻을 오래 품으면 마침내 일을 이루는 법.

        군의 일생의 대목적을 달성할 일을 찾아보세나.”

        때마침 일본 상해 영사관이 천장절 경축 행사를 알리는데

        “상해노거주 일인들은 홍구노 공원에

        각자 점심으로 밴또와 물통을 휴대하고 일장기를 들고노 입장하라.”

        김구가 다시 병공창에다 물통과 도시락에 폭탄을 장치할 수 있는지

        몰래 교섭해 놓고, 이번에는 직접 병공창을 찾아가

        폭탄 실험까지 마쳐놓고 날이 되기만 기다린다.

     

    아니리 - 이윽고 거사 전일, 윤봉길이 다시 와서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선서식을 마치고, 다음날 새벽 선생과 함께 아침밥을 먹은 후 자동차에 올라타고 마지막 길을 떠날 적에 윤봉길이 품에서 시계를 꺼내더니 “선생님, 이 시계는 며칠 전 6원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소용없으니 제 것하고 바꾸시지요.” 김구가 봉길의 시계를 받고 자기 헌 시계를 주니, 동지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빠른잦은모리

        김구선생 그 즉시로 동포 상점에 들어가

        편지 한통 급히 써서 점원에게 내어주며

        “지금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 댁에 달려가 이 편지를 전하라.”

        편지의 내용인즉

        “오늘 어떤 대사건이 발생할 것이니

        부디 댁에 계시지 말고 얼른 멀리 피하시오.”

        김구선생 그 길로 석오 이동녕 선생 처소로 달려가서

        그 간의 진행 경과 자초지종 보고하고

        점심 전에, 무슨 소식 있기만을 기다리는구나.

     

    잦은모리

        바로 그 시각 윤봉길은 홍구공원에 도착한다.

        상해의 왜인들이 천장절 경축식장에

        물통 메고 밴또 들고 일장기 흔들면서

        꾸역꾸역 꾸역 모여들 제, 윤봉길 거동 봐라.

        조심스레 차에서 내리더니 주위를 한번 살핀 후에

        물통 메고 밴또 들고 일장기 흔들면서 행사장으로 들어간다.

        경축식 단상에는 일본군 최고 수뇌

        상해지구 요인들이 줄을 지어 앉았는데

        이윽고 군악대가 기미가요를 연주하면서 경축식이 시작된다.

        빰 빰 빰 빰 빰 빰 빰 - 차르르르르르르

     

    휘모리

        윤봉길 거동봐라 윤봉길 거동봐

        일장기 내던지고 군중 속을 헤치더니

        경축대를 향해 우루루루루루 쏜 살 같 이 뛰 나 간 다.

        물통폭탄 밴또폭탄 뇌관을 재빨리 제거하고 휙! 휙!

        단 상 위 로 투 척 하 니, 경축대 한복판에 떨어진 폭탄들이 쾅! 쾅!

        벽 력 같 은 소 리 내 며 연속으로 폭 발 한다.

        왜놈들 꼴을 봐라 왜놈들 꼬라지 봐

        육군대장 시라카와 제일 먼저 날라가고

        우에다 중장 노무라 중장 뒤를 이어 넘어가고

        주중 공사 상해 총영사 한꺼번에 고꾸라지고

        단상에 앉아 거들먹거리던 왜놈 문무대관들이

        모 조 리 팔다리 잘려나가 피투성이로 허우적대는구나.

     

    엇모리

        윤봉길 거동봐라 윤봉길 거동 봐

        감추었던 태극기를 확 꺼내 펼쳐들고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만세!

     

    아니리 - 폭탄 투척의 장본인이 한인 윤봉길로 알려지자 왜놈들이 즉각 임시정부가 있는 불란서 조계지를 대대적으로 수색하는데, 이런 급박한 사정을 모르고 있던 안창호 선생이 불시에 체포되고 말았구나. 김구가 별 수 없이 사건의 진상을 공개하기로 하고 성명서를 작성해 로이터통신사에 투고하니, 세계 각국은 동경사건과 상해사건 주모자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것다. 당시 김구 목에 현상금이 걸렸는데 그 액수가 60만원이라(요새 돈으로 치면 이것이 60억이여, 30억이여?). 왜놈들이 김구를 잡으려고 얼마나 혈안이 되었는지 알 수 있것다.

     

     

    2장 : 조국 광복은 우리 힘으로

     

    아니리 - 홍구 의거 이후 김구는 피신과 유랑의 나날을 보내게 되는 바, 가흥 인근에서 광동사람 장쩐치우(張震球)로 행세하면서 주아이빠오(朱愛寶)라는 여사공이 젓는 배를 타고 운하로 다니며 동가식서가숙 하며 지냈것다. 그러던 중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개석(蔣介石) 장쩨스와 연결이 되어 남경 모처에서 면담을 하게 되었는데, 말이 안 통하는지라 붓으로 글씨를 써서 필담으로 주고받았던가 보더라. 한문으로 주고받은 필담이지마는 소리꾼이 우리 말로 통역을 해서 전달을 한번 해보는데,

     

    엇중모리

        “동방 각 민족은 손문 선생 삼민주의에 부합되는 민주정(民主政)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할 데, 김선생 견해는 어떠하오”

        김구가 붓을 들어

        “민족 민권 민생은 우리 대한에도 절실한 터, 마땅히 동감하오”

        두 사람이 필담을 할 제 김구가 긴히 제안한다.

        “장군께서 자금을 허락하면 대한군이 만주 방면에서

        일본군 철도와 교량시설을 선제 파괴할 데, 장군의 생각은 어떠하오”

        장개석이 다시 붓을 들어

        “특무공작도 중요하나 귀국이 장차 독립하려면

        군인 양성이 더욱 중요할 터, 김선생 견해는 어떠하오”

        김구가 반기하여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요”

     

    아니리 - 감히 부탁 못했으나 진실로 바라던 바라, 독립군대 군관을 양성키로 합의가 되었구나.

     

    이렇듯 항일투쟁의 전열을 갖추고 있을 적에, 어머니 곽여사가 손자들을 데리고 감쪽같이 본국을 탈출해 오셨지. 동지들이 생신상 차려드리려 돈을 모으자 “이보라우. 그 돈 나한테 주면 내 입맛대로 만들어 먹가서.” 돈으로 드린즉, 도리어 단총을 사서 하사하시며 “거 할마이 생일잔치는 독립한 담에나 하자꾸나야.”

     

    한편 1937년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중일간에 전쟁이 전면 확대되어 일본 전폭기가 남경까지 무차별로 폭격하니 이른바 남경대학살이라! 임시정부 대가족도 모두 장사(長沙)로 피난하였것다.

     

    잦은모리

        급변하는 정세 속에 중국은,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전격 합작하여 일제에 대항하니

        우리도 민족진영 통합은 물론이요

        좌우합작이 절실히 요구된 바,

        이청천의 조선혁명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김구의 한국국민당, 3당의 요인들이

        남목청(楠木廳)이라 하는 데서 연회를 가진즉   

        광 복 진 선 논의가 잘 진척되어

        취-흥--이 도--도-할 제,

     

    빠른잦은모리 

        이때 어떤 괴한 하나 예고 없이 난입하여

        권총을 난사한다. 탕 탕 탕 탕!

        제1발에 김구가 맞고 제2발에 현익철이 맞고

        제3발에 유동열이 맞고 제4발에 이청천이 맞았구나

        연회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 되었는데, 삐삐 삐삐 삐삐 삐삐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긴급히 후송할제, 삐삐 삐삐 삐삐 삐삐

        김구는 심장 근처에 총탄을 맞고 치명상을 입었구나

     

    아니리 - 좌우 이념 대립에 빠진 어떤 무모한 괴한의 작난이었지. 병원에서는 김구가 죽은 줄 알고 문밖에 그냥 버려뒀는데, 나중에사 숨이 붙어있는 것이 발견되어 급히 치료를 받았다고 하더라. 김구가 한달만에 퇴원하여 요양하던 중 갑자기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거날, X광선으로 들여다본즉(그때도 X광선이 있었던 모양이여), 왼쪽 심장 곁에 있던 탄환이 오른쪽 갈비뼈로 옮겨 갔다는거라. 몸속의 탄환까지 좌우 갈등이 있었던가 보더라.

     

    그 무렵 임정 청사를 중경으로 옮기고자 답사를 하던 중, 맏아들 인이가 급히 달려와 하는 말이 “아버님, 할머님이 병이 나셨는데, 아버님이 보고 싶다고 하셔서 이렇게 모시고 왔습니다.” 어머님 병환은 인후증으로 광서지방 풍토병인데, 고령만 아니라면 수술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81세 고령에 이미 때가 너무 늦은지라.

     

    진양조

        아들의 손길 잡고 유언 하고 죽드니라.

        “여보게 내 아들아, 내 평생 먹은 마음 자네 뜻과 같은지라.

        자네는 반드시 우리나라 독립을 이루고, 나의 유골과 어미 유골을

        고국으로 꼭 가지고 돌아가서 고향 땅에 묻어주소.”

        김구가 기가 막혀

        “오마니, 독립을 못 보고 가신단 말씀이 웬말씀이오?

        그런 말씀 마시고 어서 일어나시오.”

        어머니 아무 대답 없이 두 눈을 감는지라,

        김구가 북받쳐서

        “오마니! 불초자식 구(九), 창수는 오마님 뜻 받들어

        기필코 조국 광복 이루리다.”

        인근 화상산 공동묘지에 석실을 지어 고이 모셨구나.

     

     

    아니리 - 그 무렵 아까운 분이 또 한분 돌아가셨으니 임정 국무총리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석오(石吾) 이동녕 선생이라.

     

    중머리

        당시 세계 정세를 볼작시면,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니

        영 · 불 · 미 · 소 연합국과 독 · 이 · 일 추축국의 대결이라.

        일제는 창씨개명에 조선어를 말살하고,

        조선 청년 학도들을 강제 징병하고,

        조선 처녀들을 군대 위안부로 끌고가며 최후의 발악을 할 적에,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는 김구가 연임되고

        부주석에는 중도파인 김규식이 임명되고

        군무부장에는 좌파인 의열단 김원봉이 임명되니,

        명실상부 좌우 연합정부가 수립된다.

     

    중중모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광복군 창설에 매진한다. ------ ------

        장준하와 김준엽 등 학병 출신 청년들이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광복군에 합류하고,

        일본군들이 가장 겁낸다는 조선의용대까지 편입되니

        광복군의 전력이 눈에 띄게 향상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군 전략 사무국 OSS가 합작하여

        한반도 진공 작전 본격적으로 추진할 제

        양국의 합동훈련 비밀리에 개시된다.

        모험성이 풍부한 자는 폭파술을 실습하고

        지적 능력이 있는 자는 정보 정탐을 연구하고

        손재주가 있는 자는 통신기기를 조작하고

        체격이 강한 자는 유격 훈련을 시킬 적에

        한인 청년 학생들 지략과 능력이 다들 뛰어난지라

        함께 하던 미군 교관들이 모두들 놀라갖고

        나이스, 베리 굿, 원더풀, 엑셀런트, 판타스틱!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이 자자하였다더라 ------ ------

     

     

    아니리 - 이때에 세계대전 전세는, 1945년 5월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고, 8월에 미군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련은 돌연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 방면으로 진공을 개시하였것다. 김구는 이런 급박한 전황을 알지 못한채 OSS 훈련 합작차 서안에 머물고 있다가 그제사 일본의 항복 사실을 알게 된즉, “앗불사! 이것은 낭보가 아니라 비보로구나. 광복군을 본국에 진입시켜 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으려던 계획이 다 허사가 되었구나.”

     

    김구는 하루빨리 과도정부를 수립할 계획으로 즉시 귀국을 꾀하였으나, 미군 사령부는 “미 군사정부가 서울에 있으니 임시정부는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라”는 일방적인 통보라. 귀국 날짜는 계속 지연되는데, 상해에서 듣는 고국 소식은 미 ․ 소의 한반도 분할점령이라는 어두운 뉴스 뿐인지라, 김구와 임정요인들은 하릴없이 개인자격으로 입국하는 것으로 뜻을 굽혔구나.

     

    세마치

        화상산에 올라가서

        잠들어 계신 어머님을 찾아 뵙고

        중경을 떠나 상해로 돌아오니

        수천명 동포들이 비행장에 환영나와

        인산인해를 이뤘난디

        이 곳이 바로 홍구 신공원,

        윤봉길 의사 거사 장소로구나

        김구선생 13년 전 그 날 일이

        생생히 떠오르는지라

        연설 중에 몇 번이나 목이 멜 제

        동포들은 만세! 만세! 외치면서

        모두들 눈물바다로구나

        불란서 조계 공동묘지 찾아가서

        아내의 묻엄 묘비 앞에 헌화하고

        보름 여를 더 기다려

        미국이 내준 수송기에 몸을 싣고

        망명생활 26년만에 고국으로 향하는구나.

    3부 갈라진 나라 - 해방시대

    1장 : 우리나라는 자주독립국가다

     

    아니리 - 이렇듯 상해를 떠나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도착한 것이 1945년 11월 하순, 해방 되고 석달이나 지난 후였지. 서대문 어느 별장에 당도한즉 죽첨장이라. 죽첨장은 2층짜리 석조건물로 후에 경교장으로 이름을 바꾸었것다.

     

    환국 다음날 백범은 미 군정사령관 하지를 방문하여 대면한 바, 미국의 일개 중장이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그런 판국이라. 당시 사람들이 하지의 행태를 풍자하기를(원래 이 사람이 ‘하~지’인데 우리는 그냥 하지 하지 했던 모양이여), “하지 하지 해 놓고는 암것도 하지 않은 것이 하지여.” “아니여, 하지 하지 해놓고는 암것도 하지 못하게 한 것이 하지여.”

    백범이 곧바로 송진우 여운형 등 정치지도자들을 만나 정부수립 방책을 논의하고 12월초 경교장에서 임정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이승만 박사도 주미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참석하였지. 며칠 후 동대문 옆 서울운동장에서(지금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자리가 거기여) 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가 대대적으로 개최되는데, 

     

    평중모리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를 제창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친애하는 동포여러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기미년 3․1 대혁명의 
        민족적 대투쟁 중에 생겨난 유일무이한 정부로서, 
        지금 우리는 해방된 기초 위에 
        독립주권을 창조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급한 임무이외다. 
        동포 형제 자매들이여 
        전민족 총단결 총궐기의 정신을 다시한번 발양해서
        남과 북의 동포가 단결하고 좌우가 합심 단결하여 
        친일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하고
        외세가 그어놓은 3․8선을 없애고 
        자주 평등 행복의 나라, 신한국을 건설합시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국민 만세! 
        우레같은 함성소리 운동장을 뒤덮더니 시가행진에 나서는데
        꽃전차 앞세우고 밀려가는 십수만 인파행렬이 장관이로구나.

     

    아니리 - 그때여 소련의 수도 모스코바에서 2차 세계대전 전후문제 처리를 위해 미 ․ 영 ․ 소 3국의 외무상이 회동하니 ‘모스코바 3상회의’라. 한국문제에 대한 합의가 나왔는데, ‘조선에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과,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 그리고 ‘5년 기한으로 4개국 신탁통치 협약을 작성하는’ 내용이라. 이 소식이 외신을 타고 국내에 전해지자 도하 각 신문들이 앞다투어 대서특필을 해놓은즉,
     

    잦은모리
        그 다음날 경교장에서 임시정부 긴급 국무회의가 소집되어 
        밤샘 회의 거친 후에 신탁통치를 결사반대할 것을 결정하고 
        미 ․ 영 ․ 중 ․ 소 4개국 원수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신탁통치는 한국민의 총의에 반할 뿐 아니라 
        원동 아시아의 안전과 평화를 파괴할 것인즉 
        귀 4국의 신중한 고려를 촉구하오.”
        임시정부는 물론이요 이승만과 한국민주당과
        조선공산당까지 모든 정치세력이 한목소리로 나선지라
        12월 30일 탁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고 
        12월 31일 대규모 반탁 집회가 개최될 제 
        좌우익을 막론하고 남녀 시민학생들 수십만명이 참가하였구나.
         “신탁통치 결사반대” “조선은 자주독립국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라”
         이때여 임시정부 국자(國字=대국민포고령) 1, 2호를 선포하는데
         “전국의 경찰 및 행정기구의 한국인은 이 시각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휘를 받으라.”
         포고문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나도니, 온 국민이 호응하는구나.

     

    아니리 - 이런 와중에 신탁통치에 찬성했던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것다. 하지는 임정 주석 김구를 암살 배후로 지목하고, 국자 포고를 ‘미 군정에 대한 쿠데타’로 규정하여 강력하게 경고를 해왔는데, 설상가상 공산당이 갑자기 모스코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며 찬탁으로 돌아서니 국론이 완전히 분열되고, 미․소 공동위원회도 계속 의견이 대립되어 공전(空轉)만 하다가 끝내 휴회를 하고 말았것다. 

     

    실망한 백범은 잠시 남쪽으로 국토 순례를 떠났다가 돌아왔지. 백범 생각에 건국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재양성이 급선무라, 효창원 옆 원효사라는 절에다가 건국실천원양성소를 개설하는데, 
     

    중중모리
        전국 각지 애국청년 100명씩을 선발하여 합숙교육을 실시할 제, 
        교육 내용을 볼작시면 독립운동사 비롯하여
        정치, 경제, 법률, 헌법, 역사, 선전, 민족, 문화 
        농촌문제, 협동조합, 사회학에 약소민족문제
        청년운동, 여성문제에 특별강의까지 더 있구나.
        강사진을 볼작시면 조소앙을 비롯하여 
        당대 일류 학자 ․ 정치인 ․ 독립운동가들 초빙되니 
        정규대학이 부럽지 않네
        “건국실천 요원들은 건국의 다리(足)가 될 것이라,
        대가리싸움은 하지 말고 다리싸움에 열중하세.
        높은 일 하려고 애쓰지 말고 낮은 일부터 열심히 하여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산 물고기가 되어보세”
        

    아니리 - 이것이 바로 역수어(逆水魚)의 쟁족(爭足)운동이라!

     


    2장 :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아니리 - 그러던 중 47년 7월, 이번에는 몽양 여운형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것다. 좌우합작에 선도적 역할을 해온 몽양이 피살되자, 김규식 홍명희 등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단결을 모색하여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였거날, 국제정세가 냉전의 심화로 미국의 세계전략이 이미 대소 봉쇄정책으로 수정된즉,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고 유엔은 총회에서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안’을 결의하였거날, 소련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대해 38도선 이북에의 입경을 거부하자, 미국은 한국문제를 즉시 유엔소총회에 상정한즉 이른바 ‘가능지역에서의 총선거안’이라. 이는 남과 북이 단독정부로 가는 수순이요 미소의 숨은 책략이라. 절체절명의 위기가 오고 있음을 간파한 백범이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를 하는데, 

     

    진양조
        “삼천만 형제 자매여!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파(自派)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조국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극악 극흉의 위험한 일이라. 
        삼천만 자매 형제여! 
        마음 속의 삼팔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삼팔선도 철폐되는 것!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해 
        단독정부를 세우는 일에는 협력하지 않겠소.
        삼천만 형제 자매여
        나의 이 애달픈 고충을 살펴 
        한번 더 깊이 생각을 해주오.” 

     

    아니리 - 48년 2월, 민족자주연맹이 남의 김구 김규식과 북의 김일성 김두봉이 회담을 갖는 4김 요인회담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으로 보냈는데, 이 무렵 유엔에서 그 ‘가능지역 총선거안’이 통과되자 군정사령관 하지는 곧바로 남한만의 총선실시 일정을 발표했것다(하지가 아무 일도 안했다는 말은 다 헛말이고 사실은 하지가 해놓고 간 일이 요 단독선거 딱 한가지 일이여). 그러자 북에서는 평양방송을 통해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를 열자고 제안하면서 김구·김규식에게는 별도의 답신을 보내왔는데, 뜻밖에도 어조가 공박·힐난조라. 주변에서는 북행을 극구 만류하거날, 남쪽만의 단독선거 일정이 공표된 절박한 상황인지라 백범이 결단을 내리는데, 

     

    엇중모리
        “나 김구는 북을 다녀오기로 했소이다.
        분단은 동족 상잔의 비극을 부를 터인즉
        남들이 갈라놓은 38선에 동족끼리 말도 못해본 
        미욱한 민족이라는 그런 말을 들을 수는 없소.
        적어도 누군가가 노력은 하였다는 
        역사의 한 줄 기록은 남겨야 될 줄 아오.”
        

    아니리 - 백범의 북행이 발표되자 온나라가 흥분에 휩싸였것다. 한껏 성과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반대의 이유가 정반대라. “김구는 북조선에 투항하려는가, 북행을 중단하라.” 이런 억측이 있는가 하면, “선생님, 가시면 못 돌아오십니다. 가지 마십시오” 이런 충정어린 의견도 있것다. 

     

    4월 19일 아침 일찍부터 출발을 서두를 제, 거실에는 북행을 만류한다고 부녀자들이 와서 죽치고 앉아있고, 밖에는 청년학생들이 몰려와 구호들을 외치며 막고 서있는데, 백범이 아들 신과 수행비서 선우진만 데리고 승용차에 막 올라타고 출발하려하자, 한 떼의 청년들이 우르르르 뛰어나와 차 앞에 드러눕더니 “선생님 정 가시려면 우리 위로 차를 몰아가십시오.” “빵 빵--” 클랙션을 눌러도 다들 꿈쩍않고 비켜날 생각들을 않으니, 
     

    단중모리
        백범이 급기야 화를 내여 
        차에서 내려 곧장 베란다로 올라가 군중들을 꾸짖는다. 
        “대체 이게 뭔짓들이오? 
        칠십 노인이 이제 마지막으로 통일독립운동에 나서는데 
        어째 이 길을 막는게요?
        나를 염려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내가 살면 얼마를 산다고 일신의 안위를 생각하겠소.
        북쪽의 의도야 어찌 되었든 
        동족끼리 마주 앉아 조국의 운명을 결정해야 할 터,
        어려운 길이지만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니
        마지막 가는 길을 더는 막지 마시오.”

     

    아니리 - 그런데도 막무가내로 누군가가 자동차 바퀴 공기를 뽑아버려 놓니 아예 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어버린지라, 이런 낭패가 있나? 저녁시간에 회의가 잡혀있다는데, 아침에 떠나려던 것이 벌써 점심때가 되었것다. 백범이 점심으로 나온 만두국을 들 생각도 않고 하릴없이 앉아있다가 문득 한 생각이 나는데, 옛날 젊은 시절 쓰치다라는 왜놈 장교 때려죽이고 인천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하던 장면이 생각났던가 보더라. 경교장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데, 

     

    잦은모리
        백범선생 손짓으로 아들 신과 수행비서 선우진을 부르더니
        “앞문으로 나가지 않고 다른 방도는 없겠느냐?” 
        선우비서가 대답하되 
        “뒷담이 허술하여 그리로 빠져나갈 방법이 있습니다.” 
        백범이 또 묻는다. 
        “문 앞에 저 차 말고 딴 차는 또 없느냐?”
        신이가 대답하되 
        “아버님이 늘 쓰시던 뷰익 자동차가 
        시동이 잘 안 걸려서 길 건너 정비공장에 가 있습니다.”
        탈출 작전을 개시할 제, 
        서대문 경찰서 경비주임에게 장내 질서를 부탁하니 
        뒷뜰에 사람들을 앞뜰로 모다 모아 주었것다.
        그때여 선우진은 거실을 살짝 빠져나와 
        뒷담에 썩은 송판을 급히 뜯어낼 적에 
        신이는 부녀자들을 자기 방에다 모아놓고 
        중국시절 사진첩을 좍- 늘어놓니, 
        모두들 사진에만 정신이 팔렸구나.
        같은 시각, 운전기사 정태훈은 뷰익차를 찾아 
        겨우 시동 걸어놓고 적십자병원 뒷골목에서 대기할 제, 
        선우진 거동 봐라, (몰래 속삭이듯)선우진 거동 봐
        백범 선생을 모시고 몰래 살짝, 
        가만 가만 가만 가만 살-금 살-금
        동편 끝 계단으로 해서, 지하 보일러로 내려가 
        석탄 구멍으로 간신히 밀어올려 
        겨우 빠져나오니 경교장 뒤뜰이라. 
        송판 뜯어낸 그 자리로 훌쩍 뛰어넘어 
        적십자병원 뒷골목으로 냅다 내달리니
        이것이 바로 북행 자체보다 더 어려웠던 
        경교장 탈출작전이었더라.


    아니리 - 백범선생 차에 오르자마자 “어서 가자” 재촉하니, 운전기사 정태훈이 자기도 모르게 흥분해서 악세루를 팍 밟아놓니, 부릉! 

     

    휘모리
        시동도 안 걸리던 낡은 자동차가 쏜살같이 달려간다
        영천을 얼른 넘어 구파발 바삐 지나 정신없이 달리다가 
        “아차 큰일났다. 주석님 짐가방이 
        원래 타려던 차 뒷트렁크에 들어있다.” 끼익!
        급히 정지 하였으나 너무 빨리 달려온즉 벌써 금촌이라.
        선우비서 얼른 내려 경교장에다가 급히 전화를 거는데, 
        디리릭 디리릭 디리리리리리릭(옛날 구식 교환전화기 거는 소리) 
        “아 아 여보세요, 경교장이지요? 큰일 났소.
        주석님 짐가방이 자동차 뒷 트렁크에 들어있소.”
        전화 받은 사람 하는 말이 
        “그게 무슨 큰 일이오? 큰 일은 여기 났소. 
        시방 주석님이 행방불명이오.”
        “아 아 여보세요 그게 아니고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주 석 님 은 무 사 하 니 주석님 짐가방을 내일 아침 북행하는 
        한독당 간부한테 지금 즉시 전해 지지지지 지지지지.”
        “뭐 라 고 요?”
        “주석님 짐가방을 내일아침 북행하는 한독당 간부한테...”
        “아, 좀 천천히 말 하 시 오.”
        “주 석 님 짐 가 방 을 내 일 아 침 북 행 하 는 
        한 독 당 간 부 한 테 지 금 즉 시 전 해 달 라 고 요.”
        “알았소. 내가 바로 그 한독당 간부요.” (전화 끊어지는 소리) 뚝!
        전화 끝나기가 무섭게 백범선생 다급하게 “어서 가자” 재촉하니
        행여 지체하다 시동 꺼질세라 부랴부랴 올라타고 부르응! 
        전속력으로 내달린다.
     

    아니리 - 임진강을 당도하니, 다리가 없어서 자동차로는 건널 수 없는지라, 목선에 판자를 깔아 차를 싣고 건넜것다. 개성을 지나 북으로 가는 길에 웬 팻말이 세워져 있는데, 'WARNING! 위도 38도 군사경계선’이라. 3·8선이지. 삼팔선을 넘자 소련병이 나타나 안내를 하는데, 연도 곳곳에 “이승만을 타도하자” 벽보가 붙어있거날, 자세히 살펴보니 원래 “김구, 이승만을 타도하자” 이리 써놓았던 것을 김구가 방북한다고 하니까 그냥 ‘김구’만 급하게 지워놓았다고 하더라. 

     

    평양에 도착하여 김일성과 첫 대면하여 상호 의중을 탐색하였것다. 연석회의를 관망하던 백범은 회의가 북쪽 의도대로만 진행되어서는 안되겠다 판단하고, 모란봉극장에 나가 연설을 하는데, 

     

    세마치
        “친애하는 의장단과 각 정당 단체 대표 여러분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어디 있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가 존재할 수 있으리요.
        현 단계 우리 민족의 유일 최대 과업은 통일 독립의 전취이며, 고로 
        우리의 공동한 투쟁 목표는 단선(單獨選擧) 단정(單獨政府)의 분쇄인즉
        이는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있어서도 철저히 방지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이 남북연석회의는 반드시 성공해야 할 것이오.”
        

    아니리 - 백범 연설의 핵심은 남과 북 양쪽 다 단독정부를 세워서는 안된다는 취지였것다. 허나 정작 중요한 4자회담은 계속 지체되고 일정이 다 끝나갈 무렵 회담이 어렵게 성사되었으나, 양측의 생각이 애초 다른지라 남북간 합의가 쉽지 않았더라. 

     

    방북 보름만인 5월 5일 빈손으로 귀환한즉, 5.10 총선거가 코앞에 다가왔는데, 이승만과 한민당이 양 김씨의 북행을 극렬하게 비난하며 갖은 방법으로 선거 참여를 호소하니, 단군 이래 처음 맞는 직접선거인지라, 국민들 관심이 대거 선거로 쏠렸것다.

     

    엇중모리
        제헌의회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공화헌법을 제정하여 정부 수반을 선출할제 
        대통령은 이승만이라.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공포된다.
        이때여 북에서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여 
        별도의 헌법을 채택하고 독자적인 국호를 정해 
        내각이 출범하니 수상은 김일성이라.
        남과 북에 각기 단독정부가 수립된즉
        한반도는 폭풍 전야 정적처럼 
        동족상잔의 전쟁 위기가 고조된다.
        
        

    아니리 - 그러한 동족상잔의 징후는 정부수립 전후 제주 4․3항쟁과 여순사건 등 대규모 유혈사태가 잇달아 일어나며 점차 드러난 바, 이승만 정부는 김구를 여순사건의 배후로 몰아 공격하였고, 김구는 이를 일축하였것다. 이 무렵 세간에는 김구가 암살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김구는 “나는 왜놈이 나를 죽일 일은 했어도 동족에게 죽을 일은 하지 않아서.”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더라. 

     

     


    3장 :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아니리 - 48년 말, 경교장에 정치인의 발길은 뜸해지고, 백범은 붓글씨로 소일하면서 지냈는데, 예전 중국 장사에서 흉탄에 맞은 후유증으로(몸 속에서 좌우갈등을 일으켰던 그 흉탄 말이여) 손이 떨리는지라, 백범의 서체를 떨림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총알체라고도 했던가보더라. 

     

    진양조
        정적에 잠긴 경교장, 
        정원의 뜰과 나무들은 온통 흰 눈으로 덮였는데 
        백범선생 2층 창가 햇살 속에 먹을 갈고 계시누나 
        어지러운 정세 속에 더 이상 무슨 할 말 있으리요 
        먼저 가신 선열들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얼마나 많은 선구자들 겨레의 앞에 서서 
        비바람 맞고 눈보라 헤치며 나아가셨던가 
        백범선생 붓을 들어 떨리는 손으로 한시(漢詩) 한 수를 쓰시는데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이라
        눈 덮인 들판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러이 가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지니라! 

     

    중머리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이오.
        부강한 나라 되기 원하는 것이 아니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나니,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고 새로운 문화의 힘이라
        나는 우리 대한민국이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아니라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하오.
        하여 진정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만방에 실현되기를 원하는 바이오.
        이것이 내가 원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이오.”


    아니리 - 그 해 겨울 백범은 서울시내 각처를 돌아보며 빈궁한 동포들에게 큰 돈을 희사하였는데, 그 돈은 어머님 곽낙원여사와 부인 최준례의 천장식과 아들 김신의 결혼식 때 들어온 부조금으로, 그 돈을 헐벗고 굶주린 전재민과 빈민들에 나누어 전달한 바, 그 중 금호동과 염리동에 전달된 돈으로 학교가 세워진즉, 

    중중모리
        금호동에 세운 것은 백범학원이라 이름 짓고
        염리동에 세운 것은 창암학원이라 이름 지으니
        백범 김구 어릴 적 이름이 바로 창암이로구나 
        가난한 집 태어나서 상놈이라 괄시받고 
        그렇게도 하고 싶던 공부 못한 것이 한이라.
        “헐벗고 굶주린 아해들아. 
        해방된 조국, 민국의 시대에 
        우리 말과 우리글을 마음껏 배워보고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셈본도 하여보고 
        풍금소리에 맞추어서 노래도 불러보세.
        까막눈 장님들 눈을 뜨고, 귀먹은 자 말귀 트이고
        말못하던 사람들도 말문이 확 뚫릴터이니 
        모두들 모여 보세.
        돈이 없어도 상관없고, 나이 좀 많아도 무방하고,
        머리 좀 나빠도 괜찮허니,
        주저말고 지체말고 도망말고 어서들 모여보세.”

    아니리 - 뒤늦게 학교에 다니게 된 아해들이 열심히들 공부하니, 백범은 운동회에 참석하여 손수 상품을 수여하시고 아이들과 하루를 즐겁게 보내기도 하셨더라.


    4장 :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아니리 - 선생은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새벽에 기상하여 취침하기까지 독서와 서예, 손님맞이로 늘 검소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셨는데, 1949년 6월 26일! 이 날은 일요일이라, 선생은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에 일어나 중국시선(中國詩選)을 읽으시고 아침을 드신 후 휘호(揮毫)를 여러 장 쓰시고는, 오전 11시경 창암학원 여선생을 불러 학교일을 의논하고 계셨는데, 

    잦은모리
        오전 11시 30분경 
        포병 소위 안두희가 약속 없이 찾아와 선생 뵙기를 청하니 
        수행비서 선우진이 면식이 있는지라, 별로 의심은 하지 않고 
        “선생님은 지금 면담 중이시니 잠깐 기다려주시오.” 
        안두희가 기다릴 제 면담이 길어지니 시간이 꽤 지체되었구나.
        이 때 여 헌병 대위 강흥모가 예고없이 나타나 불쑥 들어서더니
        “문산에서 오던 중에 차에 기름이 떨어졌으니 기름 좀 넣어주오.”
        강 흥 모 는 국방경비대 소속으로 선생과는 동향이라,
        기름을 가뜩 넣어주니 다시 들어와 하는 말이 
        “이왕 여기 왔으니 선생님께 인사나 하고 가야겠소.”
        그때여 창암학원 여선생이 면담을 마치고 내려와 바삐 돌아간즉, 
        강흥모가 안두희에게 뭐라 수군수군 
        고개를 까딱까딱 수작을 부리더니 
        자기가 먼저 올라가 선생을 뵙고 내려오니,
        안두희가 그제서야 서둘러 일어서며 면담할 채비를 하는데 
        선우진이 언뜻 보니 허리에 45구경 권총을 차고 있구나.
        선우진 생각에 현역 장교의 총기휴대는 있을 수 있는지라 
        크게 경계는 하지 않고 2층으로 안내하니,
        그때여 백범선생 남쪽 창가 탁자 옆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기어 계시다가 
        안두희가 들어서니 멈칫 하시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앉기를 권하시는데,
        선우진이 무심코 거실을 바로 나와
        점심 준비가 다됐는지 알아볼 양으로
        계단을 걸어 지하 식당으로 내려간즉
        선생님이 평소에 좋아하시는 만두국이 부글부글 끓고 있거날
        이때여 위층에서 탕, 탕, 탕 탕, 
        난데없는 총소리가 들리는구나

    엇모리
        선우진이 그 순간 식은 땀이 쫙 나면서 정신이 멍해지는데
        안두희가 차고 있던 권총 생각이 언뜻 스쳐 지나간다. 
        선우진 황겁하여 식당을 뛰쳐나와 계단을 뛰어 올라가니
        영문 모르는 비서들이 우왕좌왕하고 있거날, 
        그때여 2층에서 안두희가 내려오는데 
        허둥지둥거리며 도망쳐 내려오는데 
        손에는 그 권총이 들리어 있구나.
        비서들이 깜짝 놀라 긴박히 대치할 제,
        선우진 거동봐라 계단을 뛰어올라 거실로 달려간즉 
        백범선생 남쪽 창가 의자에 앉은 채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쓰러져 계시난디,
        얼굴과 가슴에서 붉은 피가 왈-칵 솟아나고 있구나.
        선우진 황망하여 덜 덜 덜 떨면서 미친듯이 소리친다.
        “의사를 불러라, 어서. 적십자 병원 의사를 부르라고, 어서.”
        이때여 1층에서는 격분한 비서들이 
        의자를 번쩍 들어 안두희를 때려눕히니 
        떨어진 권총이 바닥에 나 뒹굴고 있거날, 
        이때 마침 서대문경찰서 경비주임이 달려와 
        안두희를 붙잡아서 연행하려 할 적에
        갑자기 군 작업복 차림 괴청년들 나타나더니 
        우루루루루 달려들어 경비주임을 밀치면서 기세등등! 
        “어디서 경찰이 함부로 군인을 연행하려고 그래.” 
        윽박지르더니, 바닥에 놓인 권총을 재빨리 수거한 후
        고꾸라져있는 안두희를 질-질 질질 끌고 나가더니 
        대기시켜놓은 쓰리쿼터에 급히 올려싣고는 
        부르르르릉! 서둘러 사라지는구나. 
        이때여 선우진은 백범 선생을 의자에서 안아내려 
        다다미방에 눕혀놓고 선생의 양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아흔들며 
        선생님! 선생님---! 아무리 불러 깨어보나 
        선생은 눈을 감으시고 아무 대답이 없구나.


    아니리 - 서거가 알려지자 엄항섭이 먼저 달려오고, 조소앙 조완구 김창숙 오세창 안재홍 선생이 달려와 충격 속에 비탄에 잠겼는데, 아들 김신 소령이 뒤늦게 달려와 말없는 부친을 붙들고 오열을 하는구나. 경교장 밖에는 소식 듣고 달려온 동포시민들이 연일 뜰을 가득 메우고 엎드려 절하며 통곡들을 하는데, 

    창조
        선생님! 선생님은 가셨는데 무슨 말을 하오리까.
        울고 다시 울고 다만 통곡할 뿐입니다. 
        청춘도 명예도 안락도 다 버리고 만리 해외로 떠다니시며 
        오직 일편단심 조국의 광복과 
        완전 자주 통일독립만을 위하여 살으신 선생님!

    진양조
        선생님의 고난일생 지성일념이 이러했거늘
        마지막에 원수 아닌 동족의 손에 피를 뿜고 가시다니요.
        이것이 선생님에게 바친 최후의 보답입니까?
        동포 형제여, 가슴을 치고 통곡하십시오.
        선생님! 천지가 캄캄하고 강산이 적막합니다.


    아니리 - 열흘간의 문상이 끝난 후 장례식이 거행될 제, 김구선생 영구가 경교장 문 앞에 놓인 하얀 영여 위에 모셔지고 흰 꽃으로 두루 장식된 다음, 천판(天板) 위에 커다란 태극기가 덮여지고, 이윽고 좌우 양편 100명의 호상원이 영여를 어깨에 메고 나아가는데, 

    중머리
        어너 어너 어너허 넘자 어이가리 넘자 너화넘
        오호 여기 발구르며 우는 소리
        지금 저기 아우성치며 우는 소리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바다조차 우는 소리 
        끝없이 우는 소리 임이여 듣습니까, 임이여 듣습니까? 
        어너 어너 어너허 넘자 어이가리 넘자 너화넘.
        이 겨레 나갈 길이 어지럽고 아득해도
        임이 계시오매 든든한 양 믿었더니
        두 조각 갈라진 땅 이대로 버려두고 
        천고의 한을 품고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어너 어너 어너허 넘자 어이가리 넘자 너화넘.


    아니리 - 경교장 문앞부터 종로 동대문으로, 심지어 날이 가물어 바닥이 다 드러난 청계천까지 100만 조객이 운집한 가운데, 분노와 애통과 오열로 가득찬 장례행렬에 수천 개의 만장이 하늘을 뒤덮고, 소복단장한 여인들의 호곡(號哭)이 구천에 메아리치거날, 이 날 밤 늦게야 먼저 가신 항일의사들 묘역이 있는, 안중근 의사 가묘가 있는 효창원 장지에 수십 개의 촛불을 켜놓고 하관식을 마쳤것다. 

    엇중모리
        촛불이 어둠을 밝히며 하늘로 하늘로 타오르니, 
        백범선생 불꽃같은 생애를 상징하는 것 같았더라.
        어화 세상 벗님네들, 월인천강(月印千江)일러니 
        선생은 비록 가셨으나 결코 가신 것이 아니로세
        백범 김구선생의 고귀한 뜻과 정신은 
        오천만 우리 겨레 가슴마다에 새겨있고, 
        시대마다 새 싹이 돋고 새 움이 틀 것인즉
        선생님 가신 발자국 따라 
        아름답고 힘찬 그 길로 함께 손잡고 걸어가세. 
        자주 민주 평화 평등 
        문화 상생의 새 역사를 함께 열어보세.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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