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여덟 아홉 살에 시를 짓고 문장 쓰고
사서오경이 거뜬하다
대학을 읽어 자신을 닦아 다스릴 도리를 배우고
논어를 읽어 배움의 기쁨과 어질 인(仁)자를 깨닫고
맹자를 읽어 의(義)를 깨우쳐 천지 이치를 새기고
중용을 읽어 성정의 덕과 만물의 원리를 꿰고,
시경을 읽어 옳고 그름과 착하고 악함을 가리고
서경을 읽어 유가의 법도와 그 기원을 밝히고
춘추를 읽어 역사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기르고
예기를 읽어 예(禮)의 절차와 인륜지 대의를 찾으며
역경을 읽어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이치를 구하니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고,
열을 알면 백가지를 깨쳤던가 보더라.
아니리 - 귀농이 일곱살 때 처음 시를 지었는데 소산폐대산(小山蔽大山) 하니 원근지부동(遠近地不同)이라!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멀고 가까움이 다름이라.” 천재여.
2.청년 정약용 : 뜻을 세우다
아니리 - 귀농이 15세 되던 해, 관례를 치르고 장가를 드니 관명은 약용이요 자(字)는 미용이라. 약용의 처가가 당시 명문 세도가의 하나인 ‘풍산 홍씨’ 집안으로, 이때 마침 아버지 정재원이 호조좌랑으로 임명되니 마재 시골촌놈 약용도 한양에 집을 얻어 서울 살림을 하게 된즉,
중머리
정약용이 젊고 패기있는 남인 선비들과 교제할제
대(大)실학자 성호 이익의 유고(遺稿)를 접한지라
실사구시를 크게 깨달아 자기 학문의 길로 삼는구나.
이때는 어느 땐고 정조 즉위 초년이라.
아버지 정재원이 화순 현감으로 발령 난즉
약용도 따라가 글공부에 힘을 쓸제
그 해 겨울 둘째형 약전과 함께 동림사에 머물면서
얼음 깬 물로 세수하며 맹자를 독파하니 호연지기 이 아니냐.
아버지가 다시 예천 군수로 옮겨감에 따라간 약용,
제도의 모순을 목격하며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약용 나이 21세 서울로 돌아와 거처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뜻을 세우는데,
“경학 체계를 바로잡고 실학으로 학풍을 일으켜 세상을 개혁하리.”
굳은 의지를 다짐한다.
아니리 - 정약용이 남달랐던 건 사또 자제임에도 특권과 부귀를 누리기보다 백성들의 고단한 삶에 관심을 가진 것이라. 부조리한 세상을 목격한 정약용, 썩은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출사(出仕)하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라 생각하고 밤낮으로 공부를 했것다.
3. 정조와의 만남 : 風雲之會
아니리 – 그러던 중 1783년, 정조 7년 세자 책봉 경축을 위한 증광감시가 열려, 약용은 둘째형 약전과 함께 초시에 이어 회시 생원과에도 합격한 바, 약용 나이 22세라. 과거시험 합격자들이 창덕궁 선정전에 들어가 임금께 사은의 예를 올릴 적에,
세마치진양
정조가 친히 나와 유생들을 돌아볼제
미관의 한 청년에 눈길이 절로 가니
“얼굴을 들라. 네 나이가 몇이냐?”
정약용이 대답하기를 “소인, 임오생이옵니다.”
임오년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억울하게 죽은 해라.
“아버님이 돌아가신 그 해 이 청년이 태어났으니
필시 아버님이 아들을 지켜주려 보내주신 인연이라.”
각별한 관심이 일어난다.
중모리
정약용이 성균관 태학생으로 지낼 적에
정조가 유생들에게 과제를 내리는데
“중용해제‘에 관한 난해한 질문들이라.
정약용이 고심하여 ‘중용강의’라는 답안을 제출한 바
남인은 대대로 퇴계의 설을 따르거날
남인인 정약용이 파가 다른 율곡의 설을 지지한즉
정조가 평하기를
“정약용의 답안이 출중하다.
당파를 따르지 않고 오로지 옳은 것에서만 답을 구했으니
깊은 사고와 열린 태도는 탕평의 정신이라.”
영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만났으니
풍운지회(風雲之會) 이 아니냐.
4. 천주학을 접하다
아니리 – 그 무렵 정약용한테는 또다른 풍운이 감돌고 있었으니, 천주학이라. 정약용 가계를 살펴보면 천주학에 관련하여 특기할만한 인척들이 있는바, 이벽과 이승훈이지. 이벽은 약용의 큰형님 약현의 부인 즉 큰형수의 동생이고, 이승훈은 약용의 누나와 혼인한 매형(妹兄)이고... 이벽이 이승훈에게 북경 선교사한테 천주교 서적을 구해다 달라고 부탁했고, 이승훈은 북경에서 조선사람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한테 세례를 주었거든. 각설하고, 이때는 어느 땐고. 1784년 4월 어느날, 정약용 형제 일가친척들이 몇해 전 세상을 떠난 큰형수 제사를 치르러 마재에 모였다가 서울로 돌아가는데,
진양조
약전과 약용 두 형제와 이벽까지 세 사람이
두물머리 물줄기로 배를 타고 열수(洌水-한강)를 내려간다.
양안에 계곡이 나타나며 두미협을 지나갈제
이벽이 품에서 책을 한권 내놓으며 천주학 얘기를 꺼내는데
천지창조의 시초이며
사람과 신의 존재 여부며
삶과 죽음의 이치까지 전혀 새로운 학설이라
마치 장자에 나오는 구절
하늘의 강이 멀고멀어 끝이 없음과 비슷하거날
두 형제가 한편으로는 놀라우며 한편으로는 의아하여
강물의 흐름도 잊어버리고,
배가 떠 있음도 잊어버리고
황홀경에 빠져 있다 문득 정신 차려 바라보니
한양의 진산 삼각산 봉우리가 우뚝 솟아 빛나는구나.
아니리 - 약전과 약용은 그 후 천주실의(天主實義) 같은 책을 읽으며 천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셋째인 약종이 뒤늦게 알고 함께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 그러다가 신해년(1791년) 겨울 진산에 사는 외종형 윤지충이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단지를 부순 사건이 일어난즉, 나라에서 천주학을 엄중하게 금했거날, 늦게 접한 약종은 오히려 더 깊이 빠져들고, 먼저 접한 약전과 약용은 근신(謹愼) 했다고 하더라.
5. 배다리(舟橋) 설치
아니리 – 그러던 중 정조 13년(1789년) 약용 나이 28세때 대과에 급제하여 초계문신(抄啟文臣)으로 발탁된 바, 능력을 발휘할 특별한 기회가 왔으니 한강 배다리 설계라. 효심이 지극한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 읍치 부근으로 옮기는 계획을 세운 바, 왕의 행렬도 문제지만 사도세자의 상여가 강을 건너야 하니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할 계획을 세울 적에, 임금이 정약용을 따로 불러 설계를 명해 놓니,
중머리
정약용이 명을 받고, 배다리 설계에 착수한다
첫째로 살필 바는 지형이라.
노량을 볼작시면 언덕이 높고 수심이 깊으며
물 흐름이 완만하니 최상의 조건이라.
둘째로 따질 바는 강폭이라.
강 넓이는 300발로 기준을 삼아 최소화 할 것이며,
셋째는 배의 선택이라.
경강의 튼튼한 배들을 이권을 주어 동원(動員)하면
새로 배 만드는 비용을 대폭 절감할 터,
일석삼조가 이 아니냐.
중중모리
3십6척의 크고작은 배를 높낮이로 배치할제
한 척은 상류로 머리를 두고 한 척은 하류로 머리를 두어
막대기를 끼어 연결한 후 칡끈으로 꽁꽁 묶고
그 위에 송판을 횡으로 깔고
송판 위에 흙을 덮어 난간을 설치하고
홍살문을 세워 놓니 무지개 다리가 생겼구나.
상여도 지나고 가마도 지나고 말들과 수레도 지나가고
임금도 지나가고 신하들도 지나가고
군사도 지나고 궁녀도 지나고 일반 백성들도 따라가니
도강하는 이 광경이 과연 세상의 장관이라.
6. 수원화성 설계와 축성
아니리 – 1792년 4월 진주목사로 있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니 약용은 광주(廣州)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르고 있었는데, 뜻밖에 정조가 수원화성을 설계하라는 특명을 내렸것다. 정약용이 왕이 직접 보내준 중국의 귀한 책들에다 윤경의 보약(堡約)과 유성룡의 성설(城說)을 탐구하여 규제를 지어 바치는데,
중중모리
왕명을 받은 정약용이
화성 성곽 축성을 위한 여덟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첫째는 성의 치수요, 둘째는 축성 재료요
셋째는 필요한 흙의 조달이요, 넷째는 기초를 다지는 일
다섯째는 돌 뜨기요 여섯째는 길 닦기라
일곱째는 효율적인 수레 만들기요, 마지막은 성벽의 제도라
왕이 듣고 감탄하며 화성축성 성역소를 설치케 하니
요샛말로 이것이 화성 프로젝트(project)였던가 보더라
잦은모리
최고책임자 총리대신에 채제공이 임명되고
축성 총괄 감동당상에 조심태가 임명되고
현장 실무 도청에는 이유경이 임명되어
모군을 담당하야 인부들을 동원할제
돌을 다루는 석공이며, 나무를 깎는 목수며
벽돌 굽는 와벽장에, 기와 덮는 개장이며
수레 만드는 거장에다, 톱질하는 톱장이
미장이에 대장장이, 화공에다 조각장에
단청 칠하는 가칠장, 맷돌 만드는 마조장에
나막신 만드는 목혜장, 문고리 만드는 박배장에
석회 굽는 회장까지 두루두루 모집할제
단청 칠하는 화공 일은 승려 장인의 몫이요
와벽장은 드문지라 함경도에서 차출한다.
휘모리
전국에서 인부들이 구름같이 몰려든다
상놈이라 성만 있고 한자 이름은 없는데
김씨 성은 김가노미, 이씨 성은 이가노미,
키가 커서 조큰노미, 키 작아서 고자근노미
고집 세다 최고집이, 욕 잘한다 마욕쟁이
말 안듣는 우망아지, 눈깔 크다 안부엉이,
얼굴 붉다 홍불그레, 시커멓다 강검돌이
혹이 나서 유혹불이, 배 나와서 배불뚝이
뚱뚱하다 오뚱보, 빼짝 말랐다 서 빼빼
기특하다 윤기특이, 달라붙는 송진드기
쉰살 먹은 백쉰동이, 팔월에 난 우팔월쇠,
날라간다 노날라리, 솜씨 좋다 하깽쇠,
복도 많다 박복돌이, 복도 없다 허박복이
첫째 아들 정일돌이, 귀한 자식 천귀돌이,
똑부러진다 민똑똑이까지 그저 꾸역꾸역 몰려들어
일한만큼 품삯을 주니 앞 다투어 일을 한다.
화성 성곽 축성 노역에 나서느라
우당탕탕 야단을 하는구나
잦은모리
숙지산 돌 8만덩이와 여기산 돌 6만덩이,
권동의 돌 3만덩이, 팔달산 돌 1만덩이,
돌을 캐서 옮기는데, 수레에 실고 썰매에 실고
소에 실고 말에 실고, 지게에도 짊어지고
무거운 돌을 올릴 때는 거중기와 녹로를 쓰고
가파른 길을 오를 때는 유형거가 제 격이라.
장안문과 팔달문을 먼저 쌓고 지을 적에
안면도 풍락송과 장산곶 표외송,
통영, 여수, 해남에서 온 느티나무
최고의 목재들로 누각을 짓는구나
성벽을 쌓는 중에 행궁부터 건축하고
장대를 완성하니 화성 읍성이 드러날제
버들잎을 닮은 성곽이로구나.
중중모리
화성의 정문은 장안문 웅장하고 아름답다
사통팔달 뚫려있는 화성의 남문은 팔달문
군사들을 지휘하는 화성 장대는 서장대요, 연무대는 동장대라
공심돈 망루와 수문 돌다리, 무지개 누각은 화홍문이요
꽃을 좆고 버들을 따르니 방화수류정 분명쿠나
봉화를 피우는 봉돈이며 성문 좌우에 적대라
장대 옆에는 노대를 두고 그 옆에 누각은 포루인데
둥근 성벽이 한겹 더 있으니 이것이 바로 옹성이라.
팔달산 서장대 산기슭 아래 자리잡은 화성행궁
웅장하고 수려하니 그 모습 장히 빼어나구나
아니리 – 정약용은 화성 설계와 축성에서 앞선 과학지식을 활용해서 백성들의 노역을 덜고 비용을 절감한 일등공신이라. 거중기를 사용해서 80만냥 경비중에 4만냥의 비용을 절약했을 뿐 아니라 10년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를 2년 9개월 만에 끝냈으니 이것이 다 정약용의 뛰어난 설계 덕분이라. 거기다 그 엄청난 공사내역을 화성성역 의궤라 해서 빠짐없이 기록을 해놨는디, 어떤 일을 누가 책임졌는지 분명하게 가려놓으니 요샛말로 ‘공사 실명제’라. 수원화성은 군사 방어 뿐아니라 성 안에서 읍민들이 실제 생활을 하고 거기다 도시 미관까지 추구한 바, 200년이 지난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영광을 안았것다.
7. 암행어사 정약용
아니리 – 이렇듯 화성 축성이 진행되고 있던 1794년, 임금이 갑자기 약용을 부르거날, 들어가 알현을 한즉, 뜻밖에도 경기도 암행어사를 수행하라는 또다른 특명이라. 임금이 은밀히 어사들을 불러 세워놓고 엄정하게 당부를 하는데,
세마치진양
수령의 잘잘못을 조사하고 백성의 고통을 찾아내어
이를 바로잡는 것이 암행어사의 직책이라
지금 천리지역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건만
조정의 시책이 아래로 미치지 못하니
백성들이 오직 바라는 것은 암행어사의 파견이요
관리들이 다만 두려워함도 오로지 암행어사 출도라.
너희들을 경기어사로 파견하니
민생의 질고사를 낱낱이 살펴오너라.
잦은모리
정약용이 밀명 받고 경기도 북부를 암행한다.
양주 고을로 들어가, 적성 마전 연천 삭녕 네 고을을 두루 돌며
때로는 염탐하고 때로는 문초하여 민정을 낱낱이 조사한 후
사안이 중대 헐작시면 급기야 출도를 붙인다.
암행어사 출도야~ 출도 하옵신다 암행어사 출도야~
하늘이 무너진 듯 땅이 툭 꺼지난 듯
천지가 진동하고 산천초목이 벌벌 떤다.
이렇듯 출도를 헌 연후에 임금께 복명(復命)을 올리는데
해당 수령의 시시비비를 소상하게 고하는구나.
엇중모리
적성 현감 마전 군수는
흉년에 조세를 감면하니 잘못이 없는 수령이요
연천 현감 삭녕 군수도
징병의 폐단을 제거하니 신임을 받는 수령이나,
연천 전 현감 김양직은
탐관오리의 표본이라 방탕한 생활을 일삼으며
자신의 직책을 밑천 삼아 뒷돈을 요구했고,
삭녕 전 군수 강명길은
탐욕이 도를 넘어 관청의 업무는 미뤄놓고
송사를 빙자하여 뇌물만 쌓아두었으며,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는
향교의 토지를 강탈해서 자기 조상 묘지로 쓰고
도로의 보수를 핑계삼아 관곡을 비싸게 강매하니
백성의 원성이 자자한지라,
이 자들의 죄악상을 낱낱이 고발하오이다.
아니리 – 이렇듯 수령들의 탐학스런 행위를 찾아내 엄정히 고발하였건만, 세상 일이 그리 간단치 않았지. 김양직은 어의(御醫) 출신으로 권세가 막강했고, 강명길은 사도세자 묏자리를 잡아준 지관이라, 위세가 만만치 않았거든. 그 중에서도 악연이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와의 관계라. 정약용이 서용보의 비행을 임금께 서슴없이 보고하자, 이 자가 평생 앙심을 품고 정약용을 죽이려들거나 괴롭히게 되었지.
8. 곡산부사 정약용 – 이계심 이야기
아니리 – 1795년 을묘년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이라, 특별하게 화성 행차를 계획할 제 정약용이 병조참의 직책으로 행차 계획을 세우고 시위대장 역할을 수행한즉 요새로 치면 경호실 차장이지. 정조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진 바, 정약용을 동부승지에 제수하자, 공서파가 극렬히 모략 비방하는지라, 정약용은 자신이 천주학을 떠났음을 명백히 밝히면서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린즉, 자명소(自明疏)라.
그 무렵 황해도 곡산이란 데서 수령의 탐학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난리를 일으킨 바, 주동자 이계심이란 자가 도망쳐 붙잡히지 않았는디, 정조가 정약용을 곡산부사로 발령을 냈지. 약용이 곡산으로 떠날 적에 남인 영수인 번암 채제공이 슬며시 주의를 주는데 “난리를 소홀히 다루다가는 자칫 역모로 몰릴 수 있으니 엄벌로 다스리라.” 당부를 했거날,
중머리
정약용이 곡산 땅에 부임차로 당도할제
동구 밖에서 어떤 사내 길을 막고 뛰어들어
“신관사또, 저의 읍소를 들어주시오.”
역졸들이 달려들어 몸싸움이 벌어질제
정약용이 명령한다. “멈추어라. 무슨 일이냐?”
이계심이 무릎을 꿇고
“예, 소인은 곡산부에 사는 이계심이라 하옵난디
전관 사또가 곡식을 수탈하고 포보포를 과도히 인상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은고로, 소인이 굶주린 백성 천여명을 이끌고
관가에 쳐들어가 곡간에 쌓여있던 곡식을 나눠 주었나이다.”
자초지종을 아뢰난디,
진양조
백성들이 탄식한다.
“우리네 논밭은 연년이 흉년이라
가라지 풀도 안 나는데 쑥부쟁인들 나겠느냐
야윈 목은 느러져 따오기 같고,
병든 살은 주름이 져서 닭가죽이 되었구나.
자식들은 굶다 지쳐 흙을 파먹고 누웠는데
어허, 통재로구나.”
죽기로만 작정하고 탄식을 하는구나.
단중모리
이때여 이계심 뛰쳐나와 큰소리로 외친다
“이보게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
나는 차라리 저 관가 창고 벽을 부숴버리고, 굶주린 뱃속이나 채워보고
사또 면전에 침이라도 뱉고 세상을 끝내겠소.”
사람들이 이 말 듣고 겁 먹으며 속삭인다.
“그럼 난리를 일으키잔 말이여?”
이계심이 주먹을 불끈 쥐고 목을 곧추 세우더니
“우리 수많은 백성들이 함께 힘을 모은다면
관아의 벽 하나 허물지 못하겠소? 모두 나를 따르시오.
관아로 쳐들어가 못된 사또와 아전놈들을 절단내고
빼앗긴 곡식과 재물을 모두 찾읍시다.”
잦은모리
백성들이 모여들어 괭이 들고 호미 들고,
어떤 사람은 낫을 들고 어떤 사람은 도끼 들고,
또 어떤 사람들은 빨래방망이 홍두깨방망이
깨어진 솥뚜껑 냄비를 들고
요란하게 두들기며 관아를 향해 달려간다
관아 대문을 쳐부수고 동헌으로 돌진하며
“사또는 나오거라.”
휘모리
사또는 황급하게 벽장 안으로 숨고
아전들은 혼비백산 쥐구멍을 찾을 적에
이계심이 선뜻 나서 호기있게 소리친다.
“사또는 들어라. 창고에 곡식들을 백성들에게 모두 나눠 줄 것이며
포보포(砲保布)세는 원래대로 200량만 받을 것을 요구한다.”
눈치보던 아전놈들이 엉금엉금 나오더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썩들 못 물러가느냐?”
숨어있던 사또가 이 와중에 엉거주춤 내다보며
“주모자가 누구냐? 어서 나와 무릎을 꿇어라.”
성난 백성 모두가 팔뚝을 싹싹 걷어붙이며
“내가 주모자요. 내가 주모자요.” 벌떼같이 달려드니
휘모리
사또는 다시 황급하게 벽장 안으로 뾰로로 숨고
아전들은 뿔뿔이 쥐구멍을 찾아 도망치니
이계심이 다시 나서 큰 소리로 외친다.
“이 고을 백성들은 창고에 있는 곡식들을 모두 나누어 가져가시오.”
창고문을 부숴놓니,
휘모리
백성들이 좋아라고 백성들이 좋아라고
곡간문을 허물어서 쌀가마들을 들어낸다.
우루루루루 달려들어 영차 영차 영차 영차
들어내고 들어내고 달려들어 들어내고
들어내고 돌아보면 쌀가마가 도로 수북
돌아섰다 돌아보면 쌀가마가 도로 수북
“아이고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
힘센 사람은 등에 지고 줄달음을 재촉하고
힘이 부친 사람들은 땅에 질 질 끌고가고
여자들은 치마폭에 넘지 않게 담아가고
노인들은 골마리에 주섬주섬 주섬주섬 뒤적 부시럭거릴 적에
아랫도리 정강이로 주루루루루 쏟아진다.
들어내고 들어내고 달려들어 들어내고
들어내고 돌아보면 쌀가마가 도로 수북
돌아섰다 돌아보면 쌀가마가 도로 수북
백성들이 좋아라고 맘껏 실어 날랐던가 보더라.
중머리
정약용이 읍소 듣고 판결을 내리는데
“자네의 행동은 백성의 고통에서 나온지라
천금을 주고서라도 사야 할 터,
내 이를 헤아려 자네의 죄를 묻지 않겠노라.”
징치는커녕 방면하니, 백성들의 원통함이 풀어지고
온고을의 백성들이 화락(和樂)했다더라.
아니리 – 솔로몬의 재판에 비견할만한 명판결인 바, 요새 용어로 하면 ‘국민저항권’, ‘조세저항권’을 인정한 판결이다 이 말이여.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을 200년 전에 벌써 알고 실행에 옮긴 목민관이 바로 정약용이다 이 말이여. 정약용은 곡산 부사를 지내면서 그동안 악폐로 또는 관행으로 저질러오던 착취의 요소들을 하나하나 없애고 청렴 공정으로 선정을 베푼 바, 후에
목민심서를 지을 때 곡산부사 시절 경험이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더라.
9. 사직상소(辭職上疏)
아니리 – 1799년 정약용이 38세 되던 해, 남인으로 일세의 정승이었던 번암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거날, 정조가 그 자리에 이가환과 정약용을 중용하려 하자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극렬하게 반대의견을 올려쌌더니, 공서파들이 정약용과 정약전 두 형제를 엮어서 천주학장이로 몰아 공격하니, 황망한 정약용이 관직을 아예 떠날 결심을 하고 형조참의 사직상소를 올리는데,
창조(唱調)
삼가 전하께 아뢰옵나니, 조정에 있는 동안 수없이 배척을 받아 전하의 염려만 끼치다 끝내 커다란 허물을 짊어지고야 말았사옵니다. 지금 세상 물정이 한 가문을 아울러 연루하려고 한즉, 지금 떠나지 않으면 신은 장차 형제간 패륜(悖倫)을 피할 수 없게 될 터인지라,
진양조
전하, 신은 지금 나아가도 있을 곳이 없고
물러나도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다만 고향으로 돌아가서 미천한 백성들과 함께 살며
죽기까지 전하의 성택(聖澤)을 누릴 수 있다면 더할 바램이 없사오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신의 직명을 깎도록 명하시고
사적에 실려 있는 신의 이름을 모조리 삭제케 하십시오.
성왕의 높은 은혜를 보답하지 못하옵고 대궐문을 하직하려 하매
눈물이 앞을 가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중머리
이리 상소 올려놓니 정조가 비답하되
“한번의 소(疏)로 족하니 그대는 사양치 말고
형조참의로 부임하여 직책을 수행하라.” 명 하였거날,
정약용의 결심이 굳은지라 모든 벼슬 다 버린채
임금을 뒤로 하고 홀로 낙향을 하는구나.
아니리 – 고향에 돌아와 지내던 1800년 6월 어느날 규장각 서리가 한서선(漢書選) 10질을 들고 찾아와 정조의 하교를 전하고 돌아갔거날, 다음날부터 임금이 병환에 들어 보름만인 유월 스무여드렛날 갑자기 승하하시니, 오호라, 책을 내려주시고 안부를 물으신 것이 마지막 영결의 은전(恩典)이었구나! 정약용 하늘이 무너진 듯 황급히 달려가 국왕의 장례를 지켜보고, 마재에 돌아와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짓고 홀로 들어앉아 슬픔에 날을 보낸 바, 여유당이란 한겨울에 살얼음 냇물 건너듯 경계하는 마음으로 근신하라는 뜻이렷다.
10. 신유옥사(辛酉獄事)
아니리 - 한편 정조의 아들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영조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니 벽파가 정권을 장악, 천주교회에 대한 탄압과 박해가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된즉 신유박해라고도 하고 신유옥사라고도 하는데, 신유년 옥사는 노론 벽파가 천주교를 빌미로 남인 · 시파를 숙청한 사건이었것다.
세마치진양
신유년 정월달에 정순왕후가 하교를 내리는데
“천주교는 혈연과 군신을 부정하고
인륜을 파괴하는 사학(邪學)이라.
이를 신봉하는 자는 오랑캐나 금수와 다름없는 자들인즉,
오가작통을 시행하야 샅샅이 뒤져내어
뉘우치지 않는 자는 반역죄를 적용,
연좌(連坐)제로 씨를 남기지 말고 소탕하라.”
아니리 – 신유년 박해로 정약용의 매형 이승훈과 셋째형 정약종이 체포되어 추국을 받고 서대문 형장에서 처형되었는데, 이때에 정약용도 둘째형 약전과 함께 의금부에 체포되어 국문(鞫問)을 받은 바, 천주교에 연루된 혐의는 일단 벗었으나 재판관 중 한 명이 하필 서용보라. 그 자가 경기도 관찰사일 때 어사였던 정약용이 비행을 파헤쳐 폭로했던 일로 앙심을 품고 있던 자였거든. 서용보가 끝까지 음해하는 바람에, 약용은 경상도 끝 장기현으로, 약전은 전라도 끝 신지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것다.
11. 유배 가는 길
아니리 - 유배를 떠날 적에, 숙부님들과 큰형님을 비롯한 친척과, 부인, 아들 · 조카들이 한양 성문밖까지 따라나와 두 유배 죄인을 배웅하는데,
중머리
떠나간다 떠나간다 유배길을 떠나간다.
한양성 밖 돌모루를 당도하니 세 갈래 길이 갈려있네.
숙부님들 하얗게 쇤 머리와 큰 형님 야윈 두 뺨엔
하염없는 눈물만 그렁그렁
어디로 갈꼬 어디메로 가잔말가
돌아올 날 기약 없으니 다시 만날 날 속절없다.
차마 길을 못 떠날제, 서산에 해는 벌써 기울어졌네
약전은 남쪽으로 약용은 동쪽으로 천리길을 떠날 적에
부인과 어린 자식들은 아버지를 부르면서 넋을 잃고 따라온다.
열수(洌水-한강)를 겨우 건너 한 곳을 당도하니,
가랑비는 처량하게 내리는디
어미소는 송아지를 찾고 암탉도 병아리를 부를 적에
산새들은 짝을 지어 수루루루루 삣죽
흐르난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훔쳐내며
모랫들을 저만치 지나 가물가물 사라진다.
창조(唱調)
처자식을 뒤에 두고, 둘째형과도 헤어져 경상도 장기로 길을 걷던 약용은 마침 선산이 있는 충주 하담을 지나게 되었거날, 잠시 시간을 내어 부모님 묘소 앞에서 눈물로 마지막 이별을 하는데,
진양조
“아버님 어머님,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가문이 이리 무너지고, 아들 손자 사위까지 참수되고
두 아들은 겨우 살아 이 지경이 되었네다.
불효한 이 자식은 비록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육신은 이미 골병 들어 가눌 수조차 없나이다.
부모님의 하늘같은 은혜를 보답하지 못하옵고
돌아올 기약 없이 귀양가는 이 신세를
아버님 아시나요, 어머님 아시나요?”
이렇듯이 통곡으로 사배를 한 연후에
멀고 먼 유배지로 홀로 외로이 정약용은 떠나간다.
2부 유배지(流配地)에서
1. 나주 밤남정 이별
아니리 - 신유박해로 정약용이 유배간 곳을 우리는 전라도 강진만 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정약용이 귀양간 첫 유배지는 경상도 장기였더라. 장기읍성 늙은 군교의 집에 기거하면서 곤궁한 농어촌 사람들 삶을 직접 목격한 바, 정약용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민중적 시각으로 바뀌는 계기가 이 귀양살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더라. 각설하고, 이때여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되는 황사영이 천주교 박해 상황을 담은 백서(帛書)를 몰래 작성해서 북경의 신부에게 보내려다 체포된 사건이 일어난즉 ‘황사영 백서사건’이라. 유배중이던 정약용 형제가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문을 당했는디, 조카사위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약전 약용 두 형제는 혐의는 벗었으나 다시 또 유배를 가게 되었지. 이번에는 형 약전은 흑산도로, 동생 약용은 강진으로 유배가 나서 형제가 남도 유배길을 함께 걸은 바, 나주 밤남정(栗亭)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새고, 다음날 아침 다시한번 쓰라린 이별을 하는디,
진양조
초가주막 새벽녘에 등불은 푸르스름
일어나 샛별 보니 헤어질 일 참담해라
흑산도는 하늘끝 아득한 바다
고래 이빨 산더미같아 배도 삼킨다는데
어찌 형님은 그 속으로 들어가시나요
본래 형제는 한뿌리인데
문앞에 난 두 갈래 길이 원수로구나
중모리
이윽고 동이 트니 형제가 헤어질제
정약전이 먼저 서쪽으로 향하는데
한 모룽 돌아가고 두 모롱 돌아가다
아주 깜빡 저 고개를 넘어가니
이것이 살아서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느냐
약용이 기가 막혀 빈 구릉만 바라보다
터벅 터벅 남쪽으로 길을 걸어
강진 배소로 향하는구나.
2. 강진주막 사의재(四宜齋)
아니리 - 이리하여 도착한 곳이 전라도 저 남쪽 강진. 천주교와 연루된 탓에 사람들은 유배죄인을 마마 호환같은 전염병 취급을 햇지. 요새로 치면 빨갱이 취급을 받은 거라.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강진 바닥 차가운 길 위에 버려졌거날, 이때여 동문 밖 어느 주막 늙은 주모가 정약용에게 문간방을 내주어 겨우 언 몸을 녹일 수 있었것다. 궁지에 몰린 정약용이 추운 골방에서 홀로 날을 보내는데,
세마치진양
북풍에 흩날리는 눈처럼 불어 날려
남쪽 땅 강진의 매반가에 이르렀네
정약용이 차디찬 겨울을 날제
동백꽃이 설 전에 활짝 피니, 불현 듯 깨닫는다.
“천하 만물 중에 지켜야 하는 것은
밭도 아니요 집도 아니요, 오직 ‘나’ 자신 뿐이라.
나는 나를 허투루 간수했다 나를 잃은 사람이라
‘나’를 붙잡아 굳게 지켜 함께 머무르는 것이
홀로 남은 나의 갈 길 이로구나.”
아니리 - 정약용이 고향에 계신 큰형님을 생각하며 깨달은 ‘수오(守吾)’의 참뜻이라. 한 동생은 처형당하고, 두 동생은 유배가고, 사위마저 참형당하는 멸족의 화를 당하는 중에도 큰형님 약현은 서재 이름을 ‘수오’라 하고 묵묵히 자신을 지켜냈다고 하더라.
주막에 의탁하여 겨우 몸과 마음을 추스린 정약용은 자기 골방을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붙이고 귀양살이를 시작한 바, 사의재란 마땅히 해야 할 네가지 덕목 즉 맑은 생각, 단정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 이 네가지를 일컫는 뜻이렷다.
3. 농아광지(農兒壙誌)
아니리 - 혹독한 신유년이 지나자 집에서 편지도 오고 아들 학연이 찾아오기도 하고 해서 형편이 좀 나아지는가 했더니, 강진 현감으로 부임한 이안묵이란 자가 노론의 행동대장이라, 공연한 일로 트집을 잡으며 괴롭힌단 말이여. 조심조심 근신하던 중에, 다행히 부친과 교분이 있던 강진의 부호 윤광택이란 이가 몰래 사람을 보내 도움을 주거날, 그의 아들 윤서유가 약용보다 두 살 아래라, 친구로 왕래하며 지내게 되니 귀양살이가 이제 좀 풀리는가 싶더니만, 뜻밖의 불행한 소식을 듣게 되니 고향 마재에 두고온 막내아들 농아가 마마에 걸려 이 세상을 떠났구나.
(느린)중모리
정약용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 흘리며 탄식한다.
농아(農兒)야 내 아들아
너는 평생 농사 지으며 살으라고 농아(農兒)라고 이름 주었는데
어린 네가 애비 먼저 세상을 떠나다니
이런 불행이 어디 있드란 말이냐
애비가 보내준 소라 껍질을 받고 그렇게 좋아했다 들었는데
이제 네가 갔으니 어느 뉘에게 소라를 더 보낼거나
농아야 농아야, 북받치는 서러움에
아무도 모르게 통곡한다.
아니리 – 옥사에 휩쓸려 가문이 폐족의 위기에 처한 것도 마른 하늘에 날벼락인데, 천리타향 유배지에서 전해들은 어린 아들의 죽음에 서러움이 북받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지만 귀양 사는 몸이라 고향 마재에 갈 수도 없고, 정약용은 아들의 간단한 일대기를 기록한 광지(壙誌)를 지어보내, 그 애 형더러 무덤에 읽어주게 했다더라.
4. 병자들 구휼 치료
아니리 – 정약용이 동문밖 주막에 머문 기간이 4년쯤 되는데, 주막 노파가 누군지는 알려져 있지 않것다. 헌데 정약용이 흑산도로 유배간 형님 정약전과 주고받은 편지 안에 이 노파에 관한 얘기가 있는 바, 하루는 노파가 묻기를
“영공은 많이 배웠응께 아실거구만이라우. 부모 은혜는 다 똑같은디요잉, 어찌서 애비만 중허게 여기고 어매는 가볍게 여긴당가요? 성씨(姓氏)도 모다 애비만 따르고 애미 성(姓)은 몰라라 하는디, 솔찬히 섭섭한 일이구만요잉.”
정약용이 답하기를 “아버지는 나를 낳아준 시초라고 하였소. 어머니의 은혜가 비록 깊다고 하지만 하늘이 만물을 내는 것처럼 그 시초가 중한 것이오.”
노파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마는 “왓따, 고 말씸은 어쩐지 좀 와닿지를 않네요잉. 고 말씸을 곡식이나 과일에다 비교를 허자면 애비는 종자이고 애미는 땅인디요잉, 그랑께 밤톨이 밤이 되고 볍씨가 벼로 자라는 것이 모다 땅이 가진 기운 덕택 아니것소잉? 그란디도 성씨를 가르는 것은 똑 종자만 갖고 따진단 말이시.” 정약용이 이 말 듣고 크게 깨달아 노파를 공경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하더라.
각설하고, 골방에 박혀있던 정약용이 고을 사람들과 만나게 된 계기가 하나는 마을 사람들 병을 고쳐준 일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준 일이라. 그럼 여기서 정약용이 마을사람들 병치료하는 장면을 소리로 한번 엮어보는데, 중중모리 장단으로 흥겹게 짜 나가것다.
중중모리
백성들이 떼를 지어 우루루루 몰려온다.
“주모, 계시우? 주모 나좀 봅시다.”
주막 노파가 깜짝 놀라
“뭔 일로들 이리 몰려왔대야? 무슨 해꼬지들을 할려고...?”
“어허 늙은이 망령이여. 해꼬지 할려고 온 것이 아니고...
내가 몸이 쬐께 아파서 왔당께요.”
주막 노파가 정색하며
“잉? 몸이 아파서? 아니 댁네들 몸 아픈 것이 내 탓이란 말이여?”
“어허 늙은이 능청이여. 소문 듣고 온겅께 어여 한양양반 좀 불러내요.”
“소문은 무슨 소문...?”
“앗따 시치미 떼기는... 서울양반이 알고 봉께 아주 용헌 의원이람서...”
“의원은 무슨 의원? 뭔 용한 의원?”
이리 실랑이를 벌일 적에,
정약용이 나온다. 정약용이 나오면서
“이보시오들, 나는 의원도 아니고 준비된 약제도 없소이다.”
백성들 하는 말이
“약제가 무슨 소용, 그냥 진맥만 혀 줘도 감지덕지고만이라우.“
정약용이 마지 못해 자리를 잡더니만, 차례로 진맥을 하는구나.
“이보게 아픈 사람들, 이 내 말을 들어보게.
오줌막혀 팅팅 부은 몸은 참호박꿀 딱 한숟갈로
오줌통이 쫙 열리고 부은 몸은 가라앉네.
뱃속이 더부룩해서 뒷간마저 못가는 이
소화가 잘 안 될 때는 귤껍질이 최고라네.
기침으로 사흘 밤낮 고생하는 사람들아
뽕나무 뿌리 달여먹으면 기침이 뚝 끊긴다네.
얼굴 누런 사람들아 산지차를 달여먹게
얼굴 형색이 돌아오니 신간이 다 편할세.
이보시오 동리사람들...
주변에 널린 온갖 약초 유심히 봐 뒀다가
가난하고 병든 이들 제 몸 추려 일을 하세.”
이리 처방 허여놓니
백성들이 알아듣고 기꺼이들 그리 행하였다더라.
5. 아학 천자풀이
아니리 – 유배 중에도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하는지라, 정약용이 인근 아전 자식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치는디, 문제는 당시 한자 학습서인 ‘천자문’이 중국에서 수입된 그대로라. 정약용이 유형적 낱말과 무형적 낱말을 나누고 문자 배열에 음양대립 형식을 취해 양편의 뜻이 서로 통하게 해서 이천자문을 새로 엮은 바, ‘아학 편훈의’라. 옛판소리 춘향가에도 천자풀이 대목이 있지만, 정약용 선생의 천자풀이를 판소리로 한번 개발하는디, 청중들도 서당 글공부하는 셈 치고 한번 따라 배워보것다. (진하게 표시된 漢字를 따라한다)
잦은모리
하늘 나고 땅이 생겨, 하늘 천(天) 따 지(地)
아버지 어머니 날 나셨으니, 아비 부(父) 어미 모(母)
임금과 신하는 의리에 있으니, 임금 군(君) 신하 신(臣)
남편과 안해가 유별한지라, 지아비 부(夫) 아내 부(婦)
형과 아우는 뿌리가 같으니, 형 형(兄) 아우 제(弟)
남자는 양이요 여자는 음이니, 사내 남(男) 계집 녀(女)
이렇듯 글자를 공부하면서 마음과 몸을 갈고 닦세. 마음 심(心) 몸 신(身)
유형의 실자(有形實字)는 이만 하고 무형의 허자(無形虛字)로 넘어가자.
중중모리
어질 인(仁)짜에 옳을 의(義), 예도 예(禮)짜에 지혜 지(智)
사람이라면 갖춰야 하느니, 인의예지(仁義禮智)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공경하고,
임금님께 충성하고 벗들간에 믿음이라, 효제충신(孝悌忠信)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온다, 춘하추동(春夏秋冬)
동녘동 서녘서 남녘남 북녘북 사방으로 확 트였구나, 동서남북(東西南北)
위쪽 아래쪽 왼편 오른편 두루두루 살펴보자, 상하좌우(上下左右)
늙은이 젊은이 어른과 아해라, 노소장유(老少長幼)
높을 존(尊)짜에 낮을 비(卑) 귀할 귀(貴)짜에 천할 천(賤)
사람 차별을 하지 마소, 존비귀천(尊卑貴賤)
열매 실(實)짜에 일 사(事)짜 구할 구(求)짜에 옳을 시(是)
사실에 바탕해 옳은 길 찾으니, 실사구시(實事求是)
민생(民生)이라 하는 것은 백성의 살림을 말함이요
개혁(改革)이라 하는 것은 제도를 뜯어 고침이라, 민생개혁(民生改革)
노래 소리는 부를 창(唱) 북 치는 소리는 두드릴 고(鼓)
물을문(問) 답할답(答) 묻고 답하면서, 아학 천자문(兒學千字文) 배워보세.
6. 애절양(哀切陽)
아니리 – 정약용은 학자이면서 문인이고 시인(詩人)이라, 무슨 일이든 기록해 놓고 그 소회를 시(詩)로 남겼거날,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라고 밝히기도 했지.
다산의 시 중에 계해년(1803년) 가을에 강진에서 지었다는 애절양(哀切陽)이라는 시가 전해오는 바, 애 절 양, ‘양근을 자른 일을 슬퍼한다’는 뜻인즉,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소리로 한번 재현해보는데,
중중모리
갈밭마을 젊은 아낙 떴다 절컥 주저앉으며
현문(縣門) 향해 울부짖다 동네방네 소리친다.
“동리 사람들, 이런 변고 어디 있소
쌈터에 간 지아비 못 돌아왔단 말 들었어도
사내가 남근 잘랐단 말 들어본 일 없다네
시아버지 상 치른지 삼년이 다 지났고
이제 막 갓난 아이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三代(삼대)가 군적에 올랐다기
분이 난 지아비가 이게 모두 자식 낳은 탓이라며
식칼을 갈아 방으로 들어가 자기 근을 잘랐습니다요.
어허 동리 사람들, 이것이 뭔 일이여
자식 낳은 것이 무슨 죄여.”
내리 둥굴 치둥굴며 방성통곡을 하는구나
중모리
정약용이 이 광경을 보고 혼자 탄식 하는구나
“자식 낳고 사는 것은 하늘이 주신 이치
음과 양이 화합하여 아들 딸 생기는 바
소 돼지가 거세 돼도 가엾다 할 것인데
하물며 대를 잇는 사람에 있어서랴.
양반은 놀면서도 남의 것을 빼앗는데
백성은 어찌하여 내 것마저 뺏기는가
백성들은 토지로써 논밭을 삼는데
아전들은 백성으로 논밭을 삼는구나.
이 나라를 어찌 개혁할고.”
나그네 홀로 객방에 누워
이리 생각 저리 생각 전전반측에
잠 못 이루는 밤이로구나.
7. 다산초당 풍경
아니리 – 동문밖 주막 골방에 머물던 정약용은 기실 조용히 글을 쓸 수 있는 서재가 아쉬웠지. 그러던 중 승려 혜장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고성사 보은산방에 의탁도 해보고, 또 제자 이청(이학래)네 집에도 잠시 신세를 졌는데, 유배 온지 7년째 되던 1808년 봄, 외가인 고산 윤선도 문중에 귤동에 사는 윤단이라는 처사가 찾아와 뜻밖에 어떠한 제안을 하는데,
세마치진양
저 건너 저 건너 만덕산 기슭에 올라가면
차나무들이 널려있어 다산(茶山)이라 일컫는데
대나무 송백이 우거져서 대낮에도 그늘이 짙고
숲에는 새들이 날고 초봄에 동백꽃 피어나고
한여름이면 매미 울음소리 녹음이 감싸는 곳인데
산기슭에 초가 정자가 두 채가 있으니
그 곳에 머물러 후학들을 가르치며
집필에 전념함에 어떠하오
평중모리
정약용이 반기하여 만덕산을 올라가니
차나무가 널린 것이 정녕 다산이라
마음이 흡족하야 이곳에 머물기로 작정한다.
축대를 쌓고 돌계단을 내고 초당 위에 샘을 파니
감로수가 솟는지라, 이름하여 약천이라.
초당 옆에 연못을 파고, 한가운데 조약돌을 쌓으니 연지석가산이 생겨난다.
초당 앞에 바위돌로 차 부뚜막을 만들고
초당 뒤쪽 큰 바위 벽에다 정석(丁石)이라 새겼구나
중중모리
초당 주변을 꾸밀 적에, 동서 양쪽에 암자를 짓고
초당 앞 비탈에 단을 쌓아 채마밭을 만들고
연못 주변에 꽃나무를 심어 정원을 가꿀 적에
매화 복숭아 모란 작약 수국 석류 치자까지 온갖 꽃들이 어우러졌다.
초당 옆에 두 칸짜리 띳집을 지어놓고 송풍루(松風樓)라 이름하니
밖에서 부는 솔바람 소리가 스리렁 슬기 둥덩 거문고를 연주한다.
담장을 스치는 복숭아나무, 문발에 부딪는 버들가지
따뜻한 볕날 꿩 우는 소리, 비 온 날 먹이 찾는 물고기
바위에 얽힌 단풍나무, 연못에 비친 국화꽃 그림자
언덕 위 푸르른 대나무, 골짜기 펼쳐진 소나무 물결
자연(自然) 그대로 연주를 하니, 다산팔경(茶山八景) 이 아니냐
아니리 – 정약용의 호가 다산(茶山)이 된 것이 이때부터라. 정약용 스스로는 자신의 호를 한강 옛이름인 열수(洌水)로 많이 썼다고 하고, 자찬묘지명에서는 사암(俟菴)으로 불리기를 원한 바 이는 뒷날 자기 글을 알아주는 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는 뜻. 오늘날 정약용을 ‘다산’으로 부르게 된 것은 위당 정인보 선생을 비롯한 국학자들이 다산초당을 중요시해서 다산선생, 다산학단 칭하다보니 그리됐다고 하더라.
8. 하피첩(霞帔帖)
아니리 – 다산에 정착한 정약용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우선 경학을 연구하는 일에 매진하는 한편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하고 부당한 제도를 혁파할 경세학을 구상했지. 이렇듯 정약용 선생의 다산초당 생활이 시작된 바 여기서 ‘하피첩’ 얘기를 안할 수 없지. 하피첩은 고향에 있던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입고온 다홍치마를 강진으로 보내오자 선생이 그걸 잘라서 아들에게 주는 훈계를 써서 보냈다는 서첩인즉, 이 하피첩에 얽힌 사연을 소리꾼이 소리로 한번 풀어보는데,
진양조
홍씨부인이 탄식한다. 서른 해 전 낭군을 만나
자식들 낳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잤더니
뜻밖의 역모에 휩쓸려, 유배 가신지 여러 해라
애절한 마음에 병만 깊어지니, 이내 박한 신세 어쩌리오
홍씨부인 장롱을 열더니만, 고이 간직한 치마폭을 꺼내는데
시집 올 때 입고 왔던 다홍치마로구나
중머리
정약용이 이를 받고 자탄으로 말을 한다
“몸져 누운 내 아내가 해진 치마를 보냈는데
붉은 빛이 바래 노을빛이라, 지나간 세월이 유수로다.”
치마폭을 정성스레 마름질을 하더니만
작은 서첩 만들어서, 아들들에 남길 편지를 쓴다.
“너희에게 물려줄 것은 근(勤) 검儉) 두 글자뿐
근면과 검소는 한평생 쓰고도 남나니 좋은 전답보다 나으며
재물이란 미끄럽게 빠져나가나니
손에 쥐려 하지 말고 남에게 베푸는 것이 더 나은 것.
너희는 항상 독서하며
화평한 마음으로 옛 터전을 지켜다오.
너희가 뒷 날 이 글을 본다면
분명 감회가 뭉클하게 일어날 터,
부디 부모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
평생 가슴깊이 새겨 두거라.”
이렇듯이 유훈을 남겨놓니,
노을하 치마피 하피첩(霞帔帖)이라.
아니리 – 이 하피첩이 그 후 행방이 묘연하다가 10년쯤 전 우연히 어떤 공사장에서 폐지로 발견되어 TV프로 ‘진품명품’에 나와서 진품임이 밝혀진 유물이라. 각설하고,
9. 현산어보(玆山魚譜)
아니리 – 이때여 흑산도는 정약용의 둘째형 손암(巽菴) 정약전이 유배중인 바, 형제가 헤어진 후 애타게 그리워하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자신들만의 비밀표시인 홍표를 붙이고 편지 안에 약전은 아우 약용을 다산(茶山)이라 칭하고 약용은 형 약전을 현산(玆山)이라 칭하면서 남의 눈을 피했다더라.
여기서 잠깐! 그동안 玆山(현산)을 자산이라 읽는 것이 통설처럼 되어왔으나, 검을 현(玄) 두 개로 된 ‘玆’ 字는 ‘검다’는 뜻으로 쓸 때는 ‘현’으로 읽어야 옳은바, 玆山은 현산으로 읽어야 맞다고 보는데... 청중님들 견해는 어떠하신지? 현산(玆山)은 ‘검고 검은 산이니 멀고 그윽하며 깊고 오묘한 산’이라는 뜻으로, 흑산도를 가리키는 동시에 정약전의 별호로 쓰인 것이렷다.
평중모리
정약전이 생각한다
“흑산바다 물고기들은 종류가 매우 풍부하나
이름이 알려진 것은 많지 않은지라
물고기 족보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섬사람들을 두루 만나 물어볼 제
그때여 어떤 사람, 창대(昌大)라는 이가 있는데
두문사객하고 고서를 탐독하고 있거날
성격이 치밀하야 온갖 풀과 나무, 새와 물고기를 훤히 꿰고 있는지라
정약전이 세 번을 찾아가 설득하여
드디어는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 연구를 시작한다.
잦은모리
물고기를 잡으며는 우선 외관을 그려놓고
생긴 특징을 관찰한 후 크기와 무게를 측량하고
그 다음에는 배를 갈라 해부 실험을 진행할제
고기맛은 물론이요 영양가도 따진 후에
요리하는 방법과 포획하는 방법까지
실제로 모다 확인하여 실사구시적으로 조사하는구나
엇모리
머리뼈가 단단하다, 애우치 민어
알이 탱탱 맛 더 좋다, 참조기에 굴비
흙탕물에 숨어있는 이놈 이름은 숭어
짠물 민물 섞여 사는 이놈 이름은 농어
이빨 참 단단하다, 참돔에 감성돔
가시 많다 준치에다, 등 푸르다 고등어
온통 떼로 몰려다니는, 과매기에 청어
생식기가 두 개란다, 앗따 크다 상어
바위 틈에 숨어사는, 쏨뱅이에 볼락
생긴 거는 지랄인디, 아가리 크다 아구
눈 두 개가 한쪽에 쏠린, 넙치 또는 가자미
횟감으론 일품인데, 속이 없는 밴댕이
눈알이 툭 튀어나온, 짱뚱어에다가
바다 위를 팔팔 나는, 비행(飛行)생선 날치
집 나간 며느리 돌아온다, 냄새좋은 전어
구워도 좋고 끓여도 좋은, 거 뭐시냐 병어
크기는 쬐끄만해도, 쓸모 많은 멸치까지 비늘이 있는 어류라
암컷을 낚을 때에 수컷까지 걸려든다, 앗싸 가오리
만만한게 누구 좆, 홍어 좆이여 홍어
뱀처럼 길게 생겨, 비얌 장어
술병에 특효란다, 씨원한 물메기
독이 있나 조심해라, 복짜 들어간 복어들
횟감으로나 포깜으로나, 무조건 좋은 오징어
한번 붙었다 허면, 안 떨어지는 문어
원기 회복에 제일 좋다, 짠득짠득 낙지
여인처럼 생긴 인어, 젓가락처럼 가는 뱅어
날카롭다 갈치에다, 수염 길다 왕새우
반토막을 내버려도, 다시 산다 해삼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얼굴도 없고 눈도 없다
요것이 무엇이냐, 요것이 바로 해파리
새끼 낳는 바다의 왕, 고-래-까지 비늘이 없는 어류라
휘모리
옆으로만 기어가는 벌떡게에다
마파람에 눈 감춘다 참게에 꽃게
뒷걸음으로 도망치는 가재에다
껍질 안에 살코기라 전복이로구나
바위 돌에 붙어 산다 굴 또는 석화
동굴처럼 뺑 돌아간 소라 고둥에다
대롱조개 누비조개 나박조개 주걱조개
새조개 함박조개 바지락에 홍합에다
참꼬막 세꼬막 별별 꼬막까지 온갖 조개들이 다
껍질 있는 개류(介類)로구나.
양기에 최고 좋은 해구신, 가죽껍질 쓸만하다 물개
(해구나 물개나 그놈이 그 놈인디 뭘 또 분류허냐)
미역 김을 비롯하여 감-태 파-랭이 매-생이까지 온갖 해초 무성하고,
갈매기에 까치제비 물 새 들 까지 빠 짐 없 이 기 록 한 즉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 생물학 전문서적인
현산어보(玆山魚譜) 아니더냐
아니리 – 앗따, 현산어보 한권을 싹 훑어놓고낭께 내가 소리꾼이 아니라 명절 대목장 생선도매상 주인이 되어버렸네. 어촌계 수협 조합장 되아버렸어. 그건 그렇고, 전국 유명 횟집들 이름에 자산어보라는 이름이 적지않어. 그 횟집들 이름도 다 현산어보로 바꿔야 맞는데... 아니, 손암(巽菴)선생 저서는 현산어보로 바로잡되, 횟집들은 간판 비용 문제도 있고하니 그냥 놔두는 것이 낫것고만.
10. 정약전의 죽음
아니리 –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된 동안 조정에서 두 번 해배 논의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공서파 잔당들이 방해를 해서 무산되고 말았지. 한번은 아우 다산이 해배된다는 소식을 들은 손암 정약전이 “물길 험한 흑산까지 아우가 올 수 없으니 우이도로 내가 가 있겠다” 하고 거처를 옮기려 하자 흑산도 주민들이 못 떠나게 반대해서 거의 탈출하듯 빠져나온 일이 있거날, 약용의 해배가 무산되어 끝내 상봉하지 못한 채, 1816년 ‘현산어보’와 ‘문순득 표류기’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것다.
강진 다산에서 형님의 부음을 들은 약용이 보은산(우이산) 형제봉에 올라 멀리 흑산도쪽 바다를 바라보며 통곡을 하는데,
진양조
슬프고 슬프도다
그리 어지신 분이 이리 곤궁하게 세상을 떠나시다니
원통한 그 분의 죽음 앞에
나무와 돌맹이도 눈물을 흘릴 일인데 무슨 말을 더하리오
외로운 천지 사이에
다만 손암(巽菴) 선생만이 진정 나의 지기(知己)였는데,
세상 사람 모두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오직 나를 알아주던 형님을 이제는 영원히 잃어버렸으니,
슬프고도 슬프구나. 퍼버리고 앉아 통곡한다.
11. 책타령과 해배(解配)
아니리 – 다산 선생이 강진에서 수백권의 저서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과의 협력체제가 가능했던 탓이라. 자료 수집부터 사료 발췌, 구술과 필사, 정서(精書)와 제책(製冊)까지 제자들과 협업과 분업을 해서, 요새 대학교수들 표절 시비와는 달리 다산은 학위도 없는 제자들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고 그 결과를 공유했다더라.
다산 정약용 선생은 유배 초기에는 경학에 주로 몰두하다 해배를 포기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뒤늦게 가슴속에 품고 있던 혁명적인 생각을 책으로 남긴즉 1표 2서라.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가 그것인데, 후대에 누군가 알아주어 세상을 바꾸고 나라를 개혁하는 일에 쓰일 것을 기대하며 남겨놓은 책이렷다.
그럼 여기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지은 책농사를 소리로 한번 엮어보는데, 책타령이라. 청중들도 뒷소리를 따라 받으면서 흥겹게 지어보는데,
(느린)잦은모리
에헤라 책이로다 에헤라 책이로다
예송논쟁을 끝장을 내니 기해방례변(정체전중변)이로구나 에헤라 책이로다
아이들 교육에 바탕이 되는 소학주관에 소학지언 에헤라 책이로다
예학에 대해 담은 책은 상례사전 가례작의라 에헤라 책이로다
시경의 내용을 묻고 답하니 시경강의가 절로 되고 에헤라 책이로다
서경의 해설을 총정리하니 상서고훈이 나왔구나 에헤라 책이로다
경전을 통해 경전을 고증한 춘추고징 새로 짓고 에헤라 책이로다
혼신을 다해 주역에 매달려 주역심전 완성했네 에헤라 책이로다
논어에 대한 주석을 종합해 논어고금주를 엮고 에헤라 책이로다
실천적으로 맹자를 해석한 맹자요의를 지어내고 에헤라 책이로다
대학에 대한 독창적 이론을 대학공의에 담아내고 에헤라 책이로다
중용을 전혀 새롭게 해석해 중용자잠을 편해놓고 에헤라 책이로다
음악의 경서로 외롭게 남은 책 악서고존을 찬해놓니 에헤라 책이로다
육경사서 모든 경학을 빠짐없이 이루었다 에헤라 책이로다
지역 방위를 논한 책은 민보의라 이름하고 에헤라 책이로다
강토의 역사를 고증하여 아방강역고 더한 후에 에헤라 책이로다
지리 책서 귀한지라 대동수경 찬하였구나 에헤라 책이로다
(빠른)잦은모리
에헤라 책이로다 에헤라 책이로다
경세학으로 넘어가자 1표 2서가 기다린다 에헤라 책이로다
국가의 틀을 새롭게 짜니 이것이 바로 경세유표 에헤라 책이로다
정치경제 제도를 바꿔서 새로운 세상을 꿈꿨구나 에헤라 책이로다
목민관의 지침을 만드니 이것이 바로 목민심서 에헤라 책이로다
부정부패 가렴주구를 공렴(公廉)으로 막아낸다 에헤라 책이로다
법률집행의 원칙이 서니 이것이 바로 흠흠신서 에헤라 책이로다
사람의 생명은 존귀한즉 삼가고 삼가고 삼가해라 에헤라 책이로다
이리 책농사 짓는 중에 해배 통보가 내려왔구나 에헤라 책이로다
에헤라 책이로다 에헤라 책이로다
휘모리
우리 말의 참뜻과 어원을 밝힌 아 언 각 비
상서의 많은 부분이 위서임을 논증한 매 씨 서 평
중국의 속담들과 우리나라 속담들을 재미있게 비교한 이 담 속 찬 까지
무려 5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였다더라.
아니리 – 앗따, 청중들 반응이 엄청 좋아버링께 소리꾼이 흥분을 해갖고 해배 후에 저술한 책까지 나와버렸네. 각설하고,
1818년 순조 18년, 선생 나이 57세때 조정에서 해배령이 내리니, 햇수로 18년 한많은 유배생활을 끝내게 되는 바, 이삿짐을 꾸리는데 살림 도구는 하나도 없고 책만 잔뜩 수레에다 싣고 정든 유배지 강진 다산을 떠났다더라.
고향 마재로 돌아온 선생은 한편으로는 마무리 못한 저서들을 완성하며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한편으로는 산천경개 유람하면서 여생을 보내신 바, 1822년 임오년, 태어난지 60년 되는 회갑년에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써놓더니, 75세인 1836년 2월, 부인 홍씨와의 회혼례를 앞둔 초봄날, 홀연 세상을 떠난즉, 결혼 60주년 축하잔치가 돌연 장례식으로 바뀌었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을런가?
엇중모리
200년전 다산선생 부패한 세상을 바꾸고자
온갖 방책을 강구하는 귀한 저술을 남겼더라.
다산선생 고전을 바탕으로 개혁사상 캐냈듯이,
오늘 우리도 다산사상 바탕해서 바른 개혁을 모색하세.
오늘날의 경세유표 우리 스스로 찾아내고,
오늘날의 목민심서 우리 자신이 써내보세.
다산선생 기막힌 세월, 끝까지 좌절하지 않고 백성 속으로 들어갔던
실사구시 민생개혁 그 정신을 제대로 배워보세.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람사는 세상 만들어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