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항쟁과 윤상원의 문화투쟁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윤상원 열사>
창작판소리 [윤상원가]는 [오월광주]의 속편 혹은 증보판으로, 입체창 양식을 처음으로 시도한 작품이다. 상황에 따라 장단과 악조, 성음에 변화를 주어 정확하게 이면을 표현하는 음악적 측면, 등장인물의 개별적 서사를 극대화하기 위한 분창의 도입 등 형식적 측면에서 주목해 할만한 전개 방식을 보여주었다. 새로 작곡되어 삽입된 '들불학당가'는 작품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역할을 담당 하였다.
사진틀 두개를 세워 놓는디
한 사람은 대학 학사모 청년이요 또 한 사람은 앳띤 여고생 차림이라
그 앞에다 젯상을 차려놓고 신방에 쓸 이불이며 혼례복을 널어놓고
무녀 한 사람 나오더니 넋이야 넋이로다 두사람 영혼을 불러내니
신랑은 광산 출신 윤상원이요 신부는 보성 태생 박기순이라
어떠한 신사 앞으로 나서더니 준비해 온 자작시를 낭송하는디
"돌아오는구나 그대들의 꽃다운 혼 못다한 사랑 못다한 꿈을 안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부활의 노래로 맑은 사랑의 노래로
정녕 그대들 다시 돌아오는구나"
이렇듯 두 영혼이 부부의 인연으로 맺어졌음을 선포하고
옷가지와 이불을 태워 하늘나라로 보낸후에
차려놓은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두사람을 추억하였더라
아니리 – 이 영혼결혼식의 주인공 신랑 윤상원은 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 총에 맞아 산화하신 분으로 당시 나이 31세, 신부 박기순은 78년에 들불야학 창설을 주도한 대학생 출신 노동운동가로 그 해 겨울 예기치 않은 사고로 저 세상으로 가신 당시 나이 22세의 규수라. 두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던 지인들이 두 영혼을 맺어주자고 해서 이루어진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혼례식이었더라.
창작판소리 윤상원가는 윤상원과 박기순 두 사람의 만남과 운명이 어찌해서 그리 된 것인지 그 내력을 찾아가는 가슴 아프면서도 벅찬 이야기렷다.
[첫째마당 : 윤상원의 학창시절과 유신시대]
아니리 – 윤상원은 1950년 6.25 사변이 일어나던 해 전남 광산군 임곡면 농촌마을에서 윤석동씨와 김인숙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원래 이름은 개원이라. 어렸을 적부터 남다른 점은 일기 쓰는 습성이 있었던가 보더라.
개원이 고등학교로 진학할 무렵, 아버지가 이름을 상원으로 개명하였는디, 상원이 들어간 학교가 천주교 계통 사레지오 고등학교라, 교회에서 세례까지 받은 바 세례명이 ‘요한’이거날, 사춘기 윤상원이 ‘길 잃은 어린 양’처럼 방황을 하는디,
중중모리
천성이 놀기를 좋아하고 친구 사귀기를 좋아한 즉
태권도부에 들어가서 신체를 우선 단련한 후
성서의 가르침을 따른다며 에덴클럽을 결성하고
공부보다는 떼를지어 우루루루 몰려 다닌다
타고난 재치와 말솜씨로 좌중을 완전 장악하니
윤상원이 빠진 모임은 앙꼬없는 찐빵이라
수업은 대충 빼어먹고 술 마시고 담배 피고
화투나 치면서 시간 때우다 고구마서리 앞장서고
무시로 골목을 쏘다니면서 고래고래 악을쓰고
항의라도 하는 놈은 무조건 두들겨 패놓고는
그날 밤 일기장에다가 잔뜩 후회를 해놓니
'천주의 어린양'아니 천주의 몹쓸 늑대 윤상원은
여전히 광야를 헤매는구나
잦은모리
이리 한참 놀다보니 대학 입시가 걱정이라
연이어 두번을 낙방터니 그래도 머리는 있었는지
명문 전남대학교 문리대 정치 외교학과에
삼수끝에 합격이라
이때는 어느땐고 대통령 선거정국이라
독재자 박정희가 삼선 개헌을 획책할제
엄청난 부정선거가 전국적으로 자행된다
실망한 윤상원이 인생 탐구를 해볼 양으로
수준높은 예술을 찾아 연극반에 들어가니
목소리에 연기까지 타고난 재주꾼이라
대번에 배우로 발탁된다
연극에 빠진 윤상원 젊음을 맘껏 누리며
자신의 장래를 꿈꾸는디
김대중 후보처럼 군중들을 휘어잡는
정치가가 되어볼까
아니면 전공을 살려 외교관으로 나가볼까
아니면 고시를 봐서 판검사로 나가봐
신문기자는 어떠할까 아나운서는 또 어떨까
아니면 아예 배우로? 아니면 차라리 가수로?
공연히 들떠서 갈피를 못잡더니
징집 영장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듯이
미련없이 입대를 해버리는구나
아니리 – 윤상원이 입대한 1972년 그 해 10월, 박정희 독재정권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유신헌법을 공포한바, 이 유신헌법이 얼마나 기상천외한 발상이냐 하면 대통령을 간접 선출해서 비상조치권을 부여하고 임기는 6년이되 연장은 무제한이라.........
그러던 중 1974년 1월, 장준하 백기완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이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이자, 발끈한 박정희가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더니, 4월 3일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민청학련 사건에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서 사형에다 무기에다 웬만하면 징역 10년 20년을 때려놓니, 관련 수감자 징역 총량이 1974년을 넘었다고 하더라. 이 유신시대 긴급조치가 얼마나 황당무계했는지 한 예로 당시의 금지가요 조처를 볼작시면,
휘모리 - 랩 (남녀 입체창)
일천구백칠십오년(1975년) 오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고
공연활동정화 대책이란 것이 발표된다
김민기의 '아침이슬' 가사가 불온해, 금지!
태양이 묘지위에 붉게 타올라? 가사가 불혼해, 금지!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뭔가 수상해 금지!
행복의 나라가 어디야 혹시 북한 아니야? 금지
이장희의 '그 건너' 부정적이야, 금지!
지가 잠 못 이루어놓고 왜 남 탓을 해? 금지!
송창식의 '왜 불러' 반항적이야, 금지!
장발 단속 하자는데 왜 불르냐고 건방진 놈, 금지!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방송 부적합, 금지!
하필이면 왜 각하 연설 직후에 이 노래를 트는거야? 금지!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타킴' 출연 부적격, 금지!
대통령이 키 작다고 놀리는거야 지금? 국가원수 모독이야, 금지!
신중현의 '미인' ! 표절이야, 금지!
한 번 보면 됐지 뭘 자꾸 볼라그래? 그게 바로 표절이야, 금지!
배호의 '0시의 이별' 실정법 위반이야, 금지!
통행 금지시간에 이별이라니 통금법 위반이야, 금지!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왜색가요야, 금지!
혜은이의 '제3 한강교' 염세적이야, 금지!
조영남의 '불 꺼진 창' 퇴폐적이야, 금지!
불 켜놓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퇴폐적이야, 금지!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비관적이야 금지!
제목이 너무 길어 금지!
무조건 금지 하여간 금지 도대체 금지 도무지 금지
어쨌든 금지 금지 금지 금지
아니리 - 심지어 어떤 노래는 아무 이유도 없이 금지를 해놓니, 어처구니 없는 요 '공연활동 정화대책'이란 것이 요샛말로 원조 문화계 '블랙리스트'였던가 보더라.
[둘째마당 : 인생의 갈림길 - 취직이냐 운동이냐? ]
아니리 - 윤상원이 제대해서 복학한 후 집안 형편도 어렵고, 장남으로 책임은 있고 해서 타임(Time)지 읽어가면서 외무고시 준비를 하던 중 뜻밖에 어떤 선배를 만나게 된 바 그가 김상윤이라.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갔다 나온 선배로, 그가 권한 것이 투철한 자기의식을 위한 책읽기라. 몇 명씩 조를 짜서 은밀하게 모임을 갖는디, 공안당국 용어를 빌리면 ‘운동권 의식화 학습’이렷다. 이 과정에서 상원의 역량이 돋보인바, 요 독서모임들 안에 전남대 국사교육과 새내기였던 박기순도 있었다고 하더라.
그러다가 77년말경 김상윤은 아예 사회과학 전문책방인 ‘녹두서점’을 열고 청년운동의 활로를 모색할제, 78년 1월, 졸업을 앞둔 윤상원이 주택은행 입사시험에 떡 합격하니, 이제 집안 걱정 폈다고 부모님은 물론이고 동생들도 뛸듯이 기뻐하거날, 윤상원 자신은 별로 기뻐하지를 않고 자기가 무슨 햄릿이라고 별난 고민을 하는디, “취직이냐 운동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중모리
졸업식을 마친날 밤 홀로 상념에 빠져들며
막막한 속사정을 일기장에다 남겨논다
"내 마음은 지극 편치를 못하다
이 시각에도 젊은이들이 온갖 고초를 겪고있거날
오늘 받은 꽃다발과 그럴듯한 직장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가
독재치하 암울한 사회에서 이대로 순응하며 살 수는 없는 일
내가 지금 취직되어 팔려감은 부모님께 대한 마지막 효도일터
나는 돌아온다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이렇듯이 각오를 다지더니 정든 광주를 뒤로하고
임지인 서울로 향하는구나
아니리 – 상원의 근무지가 서울 변두리 봉천동 주택은행 지점이라. 하숙을 정해놓고 출근을 하는디, 하루종일 돈 세고 전표 끊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일인지라. 무력감에 빠진 상원은 답답하면 친구들과 술 한잔 하고 길거리서 탈춤 한바탕 추어대는 것이 낙이라. “아앗쉬--. 물러가라. 잡귀잡신 물러가라. 독재귀신 유신귀신 다 물러가라.”
그러던 중 광주에서 6.27 민주교육지표 사건이 터져 전남대 교수들이 몽땅 연행되자 전남대생들이 항의시위를 벌여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거날, 뜻밖에 후배들 몇이서 수배망을 뚫고 서울 봉천동까지 도피해 왔단 말이여. 상원이 깜짝 놀라 후배들을 숨겨주는디, 어찌 맘이 급하던지 휘모리 장단 걸어놓고 숨겨줬던가보더라.
휘모리
상원이 기가막혀 상원이 기가막혀 상원이 기가막혀
수배받던 후배들이 선배라고 피신오니 한편은 놀랍고
한편은 반가우나 이놈들을 무사하게 숨겨줄 일이 쉽지 않은지라
가슴이다 쿵쾅 쿵쾅 쿵쾅 쿵쾅 거리는디 찬찬히 바라보니
후배놈들 꼬락서니 그야말로 초췌하다 며칠간을 헤맨터라
입은 옷은 물론이요 면도도 못한 탓에 얼굴은 꾀죄죄 수염은 더부룩
복색은 상거지에 행동은 각설이라 영낙없는 도적이요
간첩 용의자라 여차직 하다가는 모조리 다 잡히겠다
후배들을 끌고 가서 동네 어귀 공중 목욕탕에 데려가서
할딱 벗겨 놓니 속은 더욱 엉망이라 서로 몰골 마주보며
키득 키득 하더니만 물로 몇번 헹구고선 목욕탕에 풍덩
어이 시원하다 동네 허름한 백반집에 들어가서 밥을 시켜 먹는디
몇 끼니를 굶었는지 왕창 퍼넣더니 아그작 아그작 던져놓고 받아먹고
던져놓고 받아먹고 던져놓고 받아먹고 던져놓고 받아먹고
던져놓고 받아먹고 아니 그건 흥보가 박타령에 나오는 대목이고
배는 우선 채웠으나 당장에 급선무가 피신처를 구하는 일
윤상원의 하숙집은 남의 눈이 있는터라
옛 친구 고아무개 어렵사리 연락해서 미아리 어딘가에
피신처를 마련하고 주변 정찰을 단단히 한 연후
호주머니 톡톡 털어 용돈을 챙겨주고 일단은 헤어졌구나
아니리 – 돌연한 후배들의 방문에 정신없이 하루를 보낸 윤상원은 밤이 깊어 하숙집으로 돌아왔는디,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도 말똥말똥했으니, 이제 뭔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긴장으로 민감하게 날이 섰던 것이렷다.
진양조
벽에 걸린 거울 앞에서 온갖 상념을 곱씹을제
도망쳐 온 후배들의 겁에 질린 모습들에
견딜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온다
"무엇을 더 주저하고 있는가 여기서 더 무엇을 얻겠다고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가?"
자리에 누워봐도 의식은 더욱 총총해져
잠이 오지를 않는구나
새벽이 다 될 무렵 윤상원 자리를 떨치더니
고향에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구나
엇중모리
"불초소생 부모님의 간절하신 뜻 저버리고
직장을 그만두고자 이 편지를 올립니다
아버님 어머님 은혜를 생각하면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데
이 나라 이 민족의 현실을 좌시할 수 없어
고난 속으로 제 한 몸 던지고자 하오니
못난 아들의 불효를 부디 용서하시고
차라리 이 길을 참된 효도의 길이라 여겨주십시오
평중모리
이렇듯이 편지를 써놓고 차마 부치지는 못했거날
윤상원 일생일대의 갈림길인지라 드디어 결단을 내렸구나
서울살이 반년만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자신만이 예감하는
새로운 삶을 찾아 벗들이 기다리는 전남 광주로 돌아온다
[셋째마당 : 박기순과의 만남과 헤어짐 - 들불야학 ]
아니리 - 광주로 돌아온 윤상원은 녹두서점 일을 도우며 노동현장에 뛰어들려고 알아보고 있었는디, 이 무렵 윤상원이 자기 적성에 딱 맞는 작품 하나를 만나게 된 바, 현대판 창작판소리 ‘소리내력’이라. 요 ‘소리내력’ 녹음테이프를 녹두서점에서 듣고는, 20분이 넘는 작품을 외어갖고 사람만 모였다 하면 아무 때나, 아무 자리서나, 북도 없이, 부채도 없이, 허가도 없이 공연을 하는디, 윤상원은 ‘소리내력’을 통해 주인공 안도와 자신을 일치시키며 억압적 사회 상황에 대한 분노를 일구어나간 것이렷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여학생 후배가 윤상원을 찾아왔거날, 박기순이라. 어허, 무슨 연애하자고 찾아온 것이 아니고... 남녀간에 만난다고 하면 꼭 고런 식으로만 생각한당께. 박기순은 윤상원이 학습모임 주도할 때 중흥동 단칸방에서 만난 적이 있는 후배인디... 허, 단칸방서 만났다고 헝께 또 오해가 생기것네이. 아 학습방으로 내놨던 자취방 말이여. 각설하고, 박기순이 집안이 운동권 가문이라. 오빠들이 운동권이여.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김남주 윤한봉 같은 운동권 골수(骨髓)들이요 보고 듣는 것이 운동 얘기뿐인즉, 저절로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갖게끔 되었것다.
중중모리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사교육과에 입학하여
독서서클 루사에서 열심히 책을읽고
학습 모임에 참가터니 민주교육지표 선언
지지시위에 연루되어 무기 정학을 당했구나
박기순이 거동봐라 조그만치도 굴함이 없이
노동야학에 뜻을두고 일로(一路) 그 일에 매진한다
학내 서클 다른 동료들에 동참을 호소하니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동지들이 모여든다
야학 이름은 무얼로 할까? 들불처럼 타올랐던
동학농민혁명을 계씅하자 들불야학 이름짓고
교실은 어디다 마련할까 광천 천주교회 교리실을
어렵사리 확보하니 역사적인 들불야학 1기가 시작된다
아니리 – 기순이 상원을 찾은 이유는, 야학의 깃발은 올렸으나 도움주던 몇몇 대학생 강학들이 군에 입대를 해버린즉 새 강학을 찾던 중에, 서울갔던 윤상원 선배가 좋은 직장 다 때려치고 광주로 왔단 소문 듣고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온 것이라. 상원은 이 무렵 광천공단 플라스틱 공장에 일용노동자로 취업이 된지라 완곡히 거절을 했거날, 기순이 계속 찾아와 강권하는디, 삼고초려(三顧草廬)라. 아니, 삼고 ‘초려’는 아니고 삼고 ‘녹두’라. 녹두서점을 세 번 찾아왔다 이 말이여. 상원의 마음이 점차로 흔들리더니, 더이상 거절 못하고 승낙을 한즉,
잦은모리
윤상원이 그날부터 들불 야학에 합류할제
기존 강학들과는 일고여덟살 차이가 난다
윤상원은 스스럼없이 자기소개를 하는디
"방년 29세 윤상원이오. 7남매 중 받아들이오."
털털한 그 모습에 천군만마를 얻은듯 모임에 활기가 넘친다
윤상원 거동봐라 낮에는 광천공단 플라스틱을 자르고
밤에는 들불 야학 총괄 계획을 세울 적에
안정된 거처 마련이 발등의 불이라
때마침 광천동에서 주민 운동을 하고있던
김영철을 알게되니 시민 아파트 방 한칸을
사글세로 빌어논즉 강학과 학생들이 밤낮없이 들락날락
상원의 거처는 합숙소가 되었구나
그때여 박기순도 아예 휴학을 한 연후에
광천고단 어느 공업사 견습공으로 들어가니
윤상원과 더불어 광주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자라
낮에는 공장생활 밤에는 강학활동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어느덧 연말이 되니 새로운 사업을 구상커날
광천공단 노동자 실태조사라 조사반을 구성할제
전남대와 조선대 활동가들이 참여하는디
검정 고무신을 신고 발이 닳도록 뛰다니는
박관현이 돋보인다 윤상원이 눈여겨 보아두었구나
사업은 확장되고 사람들로 북적이니
재정 형편이 만만찮다 너나없이 쌀과 반찬
서로 수시로 가져오고 호주머니 탈탈 털어
야학 살림을 꾸려가니 생활 공동체 이 아니냐
매일 밤 야학당에선 들불 야학 학당가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구나
중중모리 - 합창 : 들불야학 학당가
우리는 새벽이다 밝아오른다
심지에 불당기고 앞서 나가자
친구 친구 나의 친구
들불 들불 들불 들불 들불이 되어
아하 겨레의 새아침이 동 터온다
우리는 새암이다 솟아오른다
신들메를 고쳐매고 달려 나가자
친구 친구 나의 친구
들불 들불 들불 들불 들불이 되어
아하 민족의 새역사가 동 터온다
우리는 불꽃이다 퍼져나간다
땀과 눈물 삼키면서 함께 나가자
친구 친구 나의 친구
들불 들불 들불 들불 들불로 번져
아하 민중의 새세상이 동 터온다
아니리 – 들불야학에서 상원의 비중이 점점 커져놓니 재정 뒷바라지 부담이 생긴 바, 마침 광주에서 제일 큰 양동신용협동조합 직원으로 채용이 됐것다. 뭐라고? 공공기관 청탁비리 아니냐고? 주택분양 청탁비리 아니냐고? 예끼, 여기가 무슨 화천대유여? 아, 전남대 정치외교과 출신에 주택은행 경력이 있잖여? 망년을 며칠 앞둔 12월 26일, 양동신협에 첫 출근을 한 바로 그 날, 상원은 뜻밖의 참담한 비보를 접하게 된 바, 들불동지 박기순이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라. 상원이 급히 영안실로 달려간즉, 시신 앞에 가족들이 흐느끼고 있거날,
늦은 중모리
윤상원이 그시부터 먼저 떠난 기순의 시신을 지킬적에
짧은 세월 함께 지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야학 동참을 원청하던 간절한 눈빛이며
누구와도 허물없던 해맑은 웃음이며
논쟁이 한 번 벌어지면 하얗게 지샌 밤들이며
그런 날에도 새벽이면 짐짓 밝은 표정으로
서둘러 공장가던 해바라기 같은 얼굴"
착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이 행여 빠져 나갈세라
꼭 붙들고 움켜쥘제 희붐한 새벽녘
마지막 추모시를 일기장에다 남겨논다
불꽃같이 살다간 누이여 왜 말없이
눈을 감고 있는가 그대는 정말 죽었는가
믿어지지 않는 너의 죽음 앞에 나는 믿는다
그대가 살아 올 것을 그대가 불꽃으로
다시 일어 훨 훨 타오르는 들불로 살아
이내 가슴 텅 빈 가슴 속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것을 나는 믿는다 갈망한다
[넷째마당 : 들불야학, 시련과 재건]
아니리 - 세월은 무심하여 1979년이 되었는디, 들불야학 책임이 이제 온전히 윤상원한테로 넘어왔거날, 다행히 박기순 가족들이 장례 때 들어온 부조금을 들불 기금으로 희사한바, 그걸로 광천동 시민아파트 방 한칸을 전세내어 새 학당을 마련했지. 학생들 문집부터 만드는디, 문학도인 전용호가 문장 지도를 하고, 교재 등사하는 일은 고아 출신 박용준이 필경사라 걱정 없고, 총무 일은 꼼꼼한 임낙평이 담당하고, 오락시간은 통기타 잘 치는 신영일이 나서고, 친목에는 체육대회가 최고인디 ‘체육’ 하면 윤상원이지. 이렇듯 대학생 강학과 노동야학생들이 차이없이 어울리고, 주민들과도 부담없이 연대가 될제, 이런 일은 김영철씨 몫이라, 역할 분담이 제대로 되었것다. 거기다 박효선을 비롯한 문화패 후배들이 와서 ‘덕쿵! 얼~쑤’ 탈춤 한바탕 펼쳐놓으면 온동네가 축제 분위기라.
이렇듯 들불야학이 주민들 속으로 착실히 뿌리를 내릴 적에,
엇모리
어느날 난데없이 정체모를 사람들 불쑥 나타나더니
야학의 목적이며 학생 수와 수업내용
강학들 명단 등을 꼬치 꼬치 캐묻고는
수상쩍게 돌아간 후 탄압이 시작된다
전남대상담 지도관이 야학 활동을 중단하라는 압력을 가해오고
부모님을 앞세워서 협박을 해오고
교수님을 부추겨서 회유를 시도하고
심지어는 정보과형사가 일대 일로(1:1) 따라붙으니
사찰당국 공작에 야학이위기에 처한다
강학들이 하나둘씩 결강이 잦아지니 강학 보완이 급선무라
지난 겨울 찍어놨던 박관현이를 잡아라
고시원에 박혀있던 박관현이를 끌어내고
문화패가 필요하다 박효선이를 불러라
학교 교사로 잘나가던 박효선이를 빼내오고
윤상원 거동봐라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사찰과 탄압에 결연히 맞설 것을 비장하게 결의한다
손가락에다 피를내어 혈서로 맹서 하는디
“죽기위해 살자” (죽기위해 살자)
“살기위해 죽자” (살기위해 죽자)
항의문을 채택하여 관계기관에 보내는디
“부당한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즉각 중단하라)
“비열한 공작을 즉각 중단하라” (즉각 중단하라)
결연히 맞서 싸운 즉 당황한 사찰 당국
슬며시 탄압을 중지 하는 구나
단중모리
들불호 항해를 재개한다 흩어진 강학들을 차례로 수습하고
새로운 야학생을 추가로 모집하야 3기 입학식을 치르난디
윤상원에 신영일 임낙평에 전용호 등 기존 교사들이 그대로 남고
김영철에 박용준 광천 거주민들은 특별 교사로 계속 남고
박관현에 박효선이 신규 교사로 참여하니
정규 중고등학교가 전혀 부럽잖은 든든한 진용이 짜였구나
이날 입학식에서 박효선의 지도로 1기생들이 준비한 연극이 공연될 제
시민 아파트 주민들과 천주교회 청년들도 단체로 구경와서
좁은 강당이 북적북적 대성황을 이루었구나
오랜만에 학당가가 힘차게 울려 퍼졌더라
중중모리
이런 날이면 빠짐없이 뒷풀이가 펼쳐진다
신영일이가 기타를 치며 긴 밤 지새우고
나 이제 가노라 ‘아침이슬’을 불러놓면
목소리 걸걸한 박관현이 죽장에 삿갓쓰고
떠나가는 ‘방랑시인 김삿갓’을 찾아쌓고
박효선이가 숟가락으로 마이크를 쥐고서는
삼각지 로타리에 돌아가는 삼각지 배호의 히트곡을 메들리로 돌리고
있는지 없는지 눈에잘 안띄는 박용준이 벌떡 일어나
‘떠나가는 배’ 어려운 가곡을 음정과는 무관하게 제멋대로 내질르고
집주인 김영철은 벽에기대 느긋하게 바라 볼제
생두부에 맛난김치 곁들여서 술안주 갖다주던 그의부인 김순자씨
마지못한 척 수줍은 척 정성 들여 부르는 노래
청실 홍실 ‘청실 홍실’
마지막 순서는 윤상원이 차례라 와뚜뚜뚜뚜뚜 뚜뚜뚜뚜뚜뚜
‘벽오동 심은뜻은’ 봉황을 보잣더니
하늘아 무너져라 와뚜뚜뚜뚜뚜 뚜뚜뚜뚜뚜뚜
무너지는 소리에 열화같은 박수에다 앵콜 앵콜 성화로다
윤상원이 못이긴 척 판을잡고 나서니
장기(長技)인 창작판소리 ‘소리내력’ 이로구나
“어허 이게 웬일이여 이것이 웬일이여
헐벗고 굶주리고 죽도록 일했는데
매맞고 억눌려도 말 한 마디 안했는데
쉬지도 눕지도 잠들지도 못했는데
어허 이게 웬짓이여 내가 무슨 죽을 죄라
이리도 벌이 모질드란 말이냐
진양조
날아가는 기러기야 너는 내 속을 다 알리라
수수 그림자 길게 끌린 해설 핀 신작로가
우리 어매 날 기다려 상기도 거기 서 계시더냐
철지난 옷을 입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서울 쪽 바라보며 소리 없이 우시더냐
어머니 고향에 돌아가요 죽어도 나는 돌아가요
천갈래 만갈래로 육신 찢겨도 나는 가요
죽음 후에라도 기어이 돌아가요
저 벽을 뚫어 저 담을 넘어 원혼되어
저 붉은 벽돌담을 끝끝내 뚫고 넘어 가요 어머니
죽음 후에라도 기어이 돌아가요
아니리 - 상원의 ‘소리내력’이 절정에 달하면, 방금까지 깔깔대고 웃던 청중 관객들이 모두 숙연해지며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더라. 한마디로 관중을 휘어잡고 웃고 울리던 타고난 광대, 시련 속에서 질곡을 뚫고 상황을 반전시키는 천부적인 새뚝이, 걸출한 소리꾼 광대였것다.
한편 포악한 유신독재정권은 이 무렵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는디, 그러던 중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의 오른팔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자기 상전인 대통령 박정희를 시살(弑殺)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것다.
2부 시민군 윤상원
첫째마당 : 민족민주화대성회와 5.18의 발발(勃發)
아니리 – 김재규의 거사로 유신체제는 권력 내부로부터 붕괴되었는데, 이같은 권력 분열의 근저에는 심각한 민심 이반이 있었으니, 부산과 마산서 일어난 민란에 가까운 시위, ‘부마항쟁’이라. 부산 마산 지역에 군대를 투입, 강력한 진압이 있은 직후, 중앙정보부장에 의한 대통령 시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지. 시해 사건을 전담할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란 자가 테레비에 나왔는디, 인상이 영 좋질 않어. 불길한 예감이 드는디, 아니나다를까 그 해 12월 쿠데타를 일으켜 군권을 장악터니, 해를 넘겨 1980년, 언론 통제를 강화하고 중앙정보부를 접수하는 등 정권 탈취의 마각을 드러냈것다.
새학기 초 김상윤은 신혼생활에 전남대 복학을 하면서 녹두서점을 도청 인근 중심가로 아예 확장이전하고 윤상원과 공동경영하기로 계획을 세웠지. 이때여 대학가에서는 총학생회가 부활할제, 김상윤과 윤상원 생각에 전남대 학생회장으로 박관현이 적격인바 설득해서 출마토록 할 적에, 박관현이 고무신 차림이라. 상원이 주택은행에 입사할 때 김상윤이 맞춰준 양복을 관현에게 빌려줘 입게 하고 구두까지 빌려줘서, ‘민주학원의 새벽기관차’라는 구호를 내세워 압도적으로 당선된즉,
잦은모리
5월이 되자 대학생들은 학내 민주화 투쟁에서
정치 사회 투쟁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가두 시위에 나선다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교문을 뛰쳐나와
시내 거리 곳곳에서 구호를 외치난디
"비상 계엄 해제 하라" (비상 계엄 해제하라)
"유신 잔당 물러가라" (유신 잔당 물러가라)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 10만명이 집결하니 도심 전체가 마비된다
이때여 전두환은 공수부대를 이동 시키며 모종의 작전을 세우거날
이날밤 서울 지역 총학생회 대표들은 당분간 시국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한바 '서울역 회군'이라
다음 날인 5월 16일 전남 도청 앞 광장에만
3만여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운집 횃불 시위를 벌이난디
수백개 횃불에다 불을 활 활 붙여 시내 전역을 행진하니
민족민주화대성회라
총학생 회장 박관현이 마지막 연설을 하는디
"광주 시민 여러분 만약의 경우 일이 생기면
대학생들은 오전 10시에 각대학 정문에 모이고
12시 정오엔 바로 이곳 전남 도청에 집결하여
끝까지 투쟁 합시다 민주주의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삼창을 끝으로
민족 민주화 대성회는 막을 내렸더라
아니리 – 윤상원도 3일에 걸친 민족민주화 대성회에 열심히 참가하고, 야간 횃불시위에도 여럿이 대열을 짜서 참가를 했지. 인파로 가득찬 거리를 행진하면서, 이제 도도한 민주화의 물결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자신감이 차 올랐다고 하더라.
*트랙20 다음날 5월 17일, 윤상원은 녹두서점에 출근해서 밀린 일을 정리하고, 실무자로 내정된 국민연합 지부 결성을 점검하고, 오후에는 지역 현안인 노조문제를 협의하고 광천동 자취방으로 돌아간즉 후배들 몇이 와서 죽치고 있거날, 민주화 성회 뒷풀이 겸해 한잔 하고 잠에 푹 빠졌것다. 다음날인 5월 18일, 이 날은 일요일인디, 상원이 평소대로 일찍 일어나 라디오를 켠즉, 계엄확대 조치가 보도되고 있는지라.
빠른잦은모리
윤상원이 깜짝놀라 자리에서 벌떡
"다들 일어나라. 쿠데타다"
윤상원 거동봐라 동전 몇개를 챙기더니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가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는 돌아와 하는 말이
"다들 잡혀갔다. 김대중씨도 연행되고
상윤이 성(형)도 잡혀갔대. 한봉이 성이랑
관현이는 잡혔단 말은 없는디 연락이 안된다"
야학당으로 달려가서 국민연합 관련자료
문건부터 불이나케 찾아태워 없앨적에
뒤에서 인기척이 놀라 돌아보니
뜻밖에도 박관현이라.
"성님, 큰일났슴다. 총학생회장단 다 잡혀가고
연락망도 끊어져 버렸슴다.
지금 이 순간 뭣부터 해야합니까?
윤상원 이 말 듣고 냉철하게 얘기 하는디
"너는 일단 피신해라. 너는 저놈들한테 가장 큰 표적이야.
일단 숨어 지켜보다, 학생들이 부르면,
시민들이 부르면, 그 때 네가 나서라."
"알겠슴다, 성님, 가겠슴다."
박관현은 일행과 함께 바삐 동네 어귀를 빠져 나갔더라
아니리 – 상원이 녹두서점에 가보니 마침 김상윤의 동생 김상집이 막 군대 제대하고 나온지라 함께 전남대로 가본즉, 벌써 학생들이 공수부대와 대치중인디 공수대들이 느닷없이 우루루루루 뛰쳐나와 곤봉으로 사정없이 마구 패거날, 누군가 “금남로로 가자.” 학생들 내달리니 윤상원도 따라가보니 거기도 공수대가 들이닥쳐 학생 시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잡아패는지라, 혼줄 빠지게 내빼 겨우 피신을 했지. 윤상원 생각에 공수놈들 진압방식이 상상 밖인지라, 화염병을 준비토록 김상집과 논의했것다. 다음날 19일 월요일이 되었는디, 충격적인 진압작전을 목격한 시민들은 지난 밤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지. 흉흉한 소문이 떠도는디,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네.” “공수놈들을 사흘간 굶기고 약을 먹였대여.” 분노심이 타오른 시민들이 아침부터 시내로 모여들제, 전투경찰이 최루탄을 마구 쏘아대는데도 군중은 계속 늘어나 학생시위가 이제 시민항쟁으로 확대되는 차에,
엇모리
공수특전 대원들 장갑차를 앞세우고 짓치며 들어온다
철망달린 철모 써 에무식스틴(M16) 둘러메 살기등등
시위군중 한가운데로 미친듯이 달라든다
며칠 굶은 맹수가 먹잇감을 발견한듯 득달같이 쫒아와서는
곤봉으로 내려쳐 개머리판은 돌려쳐 닥치는대로 치는구나
분노한 군중들 화염병으로 격렬하게 맞설제
공수대 거동봐라 구경꾼들까지 사정없이 내갈기고
노인이건 아낙네건 군홧발로 차버리고
도망치는 청년들은 표적을 정해 끝까지 추적
개잡듯이 패는구나
골목이며 다방이며 민가 주택까지 이잡듯이 뒤져서는
길바닥으로 끌어내어 줄줄이 발가벗겨 알몸으로 기게하고
반항하는 기미가 있으면 착검한 소총으로 가차없이 찔러댄다
공수대 만행봐라 머리가 깨진 사람 내장이 터진 사람
피투성이 사람들을 질질 끌고 가더니
다리와 머리를 맞을어서 트럭위로 내던진다
백주 대낮에 눈 뜨고 볼 수 없는 사람 사냥이로구나
아니리 – 윤상원 충격 속에 학살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했것다. 악몽과 같은 사태에 분노가 하늘을 찌르난디, 싸움은 시작되었으나 싸움을 끌고 나갈 지도부가 전무(全無)한 상태라. 김상윤 형은 잡혀갔고, 윤한봉 형은 급히 피신한 상태고, 박관현은 광주를 벌써 빠져나갔는지 연락 두절이고, 막막하고 참담한 심정이거날,
한편 녹두서점에는 문의전화가 계속 걸려오고, 소식을 주고받다보니 저절로 상황실이 되었지. 윤상원 말하기를 “엄청난 사태가 신문방송에 한줄도 나오질 않으니 우리가 직접 소식지를 만들어야겠소.” 녹두서점 안주인 정현애가 금고 돈을 몽땅 꺼내준즉 “일 생기면 이 돈은 내 월급 준 걸로 합시다잉.”
아니리 – 등사기는 야학에서 쓰던 것을 사용하기로 하고, 등사원지와 잉크 · 종이를 구하러 바삐들 움직일제, 윤상원이 홀로 남아 원고 초안을 작성하는디, 너무나 분한 마음에 하고 싶은 말들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구나. 박용준이 연락받고 급히 달려와 즉시 필경을 한즉, 곧바로 등사해서 들불 교사들과 학생들이 시가지 곳곳에 배포하니 ‘광주시민 민주투쟁 회보’라.
[둘째마당 : 광주시민 봉기와 도청 탈환]
다음날인 5월 20일, 윤상원 생각에 이제 거리는 공수들과 충돌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쟁터라. 정당방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각자 송곳같은 무기를 소지하도록 조치를 취하는 한편, 유인물 연속 제작에 박차를 가할 적에,
중중모리
광주의 전시민이 도청 앞으로 모여든다
청년 학생은 물론이요 자유업에 소상인에
회사원에 노동자에 농사짓던 농부들에
목공에 자개공 수공업자에 페인트가게 점원에
양장점 주인에 피복상 주인 용당 차주에 트럭 운전사
다방 지배인에 당구장 주인 요식업소 종업원들에
대학생에 재수생 까까머리 중고교생
가정주부에 할머니들 술집 아가씨들까지
온통 쏟아져 나온다
이때여 도청상공 군 헬리콥터들이 탈탈탈탈 탈탈탈탈
위세를 부리는디 최루탄이 펑펑
페퍼포그 철망차가 위이이이이잉
시민들 거동봐라 공중전화 박스를 뉩혀갖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대형 화분과 보도 블록을 깨서
투석적을 벌일 적에 때마침 시가지에 유인물이 살포된다
"유신 잔당 전두환일파는 민족 반역의 살인극을
즉각 중단하고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으라"
윤상원이 작성한 투쟁 선언문이로구나
아니리 - 광주항쟁은 어떤 배후가 있어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광주시민 모두가 분기하여 폭발한 항쟁인디, 승패의 분수령에 몇 차례 중대한 계기가 있었으니 그 하나가 광주 민주운전기사들의 차량시위였지. 광주의 택시운전사 버스·트럭운전사들이 전재산 내놓고, 목숨 내놓고 차량시위를 벌인즉, 계엄군놈들 기가 팍 꺾였지.
또 하나 승패의 분수령은 혜성같이 나타난 어떤 여인들이라.
(외침) - 계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당신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군대입니까? 시민 여러분, 우리는 맨 주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꼭 이깁니다. 모두 나와서 힘을 합칩시다. 끝까지 물러서지 말고 광주를 지킵시다.
아니리 - 확성기를 단 용달차에 겁도 없이 올라타서 가두방송을 계속하니, 수천명 시위대가 뒤를 좇아 광주신역 광장에서 전투가 벌어졌거날, 청년들이 트럭에다 드럼통 잔뜩 싣고 불을 붙여 폭발시켜 계엄군을 퇴각시켰지. 광주시민 최초의 승리였것다.
이 날(5월 21일) 정오가 되자 시민들이 또다시 삼삼오오 도청 앞으로 집결할제, 군 저지선과 정면 대치하여 일촉즉발, 심상치 않은지라. 지켜보던 윤상원이 녹두서점에 가본즉 마침 김상집이 정상용, 정해직, 박효선 등 청년운동권 몇 사람과 모여서 화염병을 만들고 있거날,
단중모리
윤상원이 보고한다
"지금 도청 앞 현장에는 위기가 감돌고 있소"
무명의 시민 투사들이 투쟁을 이끌고 있지만
만약 계엄군이 발포하면 엄청난 피해가 예상되오"
정상용이 이 말 듣고
"사태가 엄중하니 재야 인사와 청년 운동권의
뜻을 모아봄이 어떻겠소". "그럽시다" 합의하고
각자 맡은 일을 진행한다
잦은모리
윤상원 거동봐라 광천동으로 다시 가서
들불 야학 강학들 긴급 회의를 소집!
보다 더 체계적인 유인물 제작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피력할제 강학중 한 후배가 불만을 토로하는디
"성님, 시방 이까짓 유인물이 뭔 소용이 있소?
우리도 나가서 싸우든지 합시다."
윤상원 이 말 듣고 돌연 호통을 치는디
"야 임마, 우리는 이 일이 바로 싸우는 일이야.
선전 선동은 싸움의 시작이고 끝이야.
전두환이는 총칼보다 이 투쟁전단 한 장을 더 무서워해."
모두들 숙연하더니 투쟁 전단의 명칭을
투사 회보'로 바꾸고 즉각 제작에 들어간다
빠른 잦은모리
그때여 도청 상공군 헬리콥터들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내려왔다 올라갔다
때아닌 애국가가 울려 퍼지더니
갑자기 총소리 탕탕 탕탕탕
시위 대열 일순간에 좌우로 물결처럼 쫙 갈라진다
"저놈들이 발포를 했다. 우리도 총이 있어야 한다."
시위대 차량들이 광주시를 빠져나가
총기에다 탄약에다 실탄을 확보하여
도청 앞으로 다시 집결 총격적을 벌일적에
계엄군 거동봐라 계엄군 거동봐
관광호텔 전일빌딩 요소요소 건물마다
매복 은폐하야 조준 사격할 제
갑자기 군헬기가 저공비행터니
따 따 따 따 따 따 기총소사를 가한다
시민들 피 흘리며 사방으로 피할적에
금남로가 삽시간에 아수라장 되는구나
시민군 활약봐라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서
군용트럭을 징발, 장갑차까지 끌고나와
특공대 조직하야 계엄군에 맞선다
LMG기관총으로 헬리콥터들을 향해
드드득 드드득 드드드드드드 드드드드드득
위세 부리던 군헬기들 깜짝 놀라 달아난다
휘모리
계엄군 자세봐라 계엄군 자세봐
장갑차가 한대가 퇴로를 확보터니
군용트럭 10여대가 재빨리 도망치고
경찰국 간부들은 도청 뒷담을 넘어
허겁지겁 달아난다
"만세 이겼다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되찾았다."
광주시민 만세! 해방광주 만세!
[셋째마당 : 해방 광주 -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아니리 – 이 날이 5월 21일, 음력으로는 4월 초파일, 자비가 온세상에 퍼져야 할 이 날이 집단발포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의 날이면서 동시에 광주시민 승리의 날이었지. 그리고 이 승리는 이름없는 민중들의 목숨을 건 투쟁, 그것도 무장투쟁의 결과였것다.
그리고 다음날 5월 22일, 동이 트니 해방광주 첫날이라.
잦은모리
새날이 밝자마자 윤상원 큰길로 뛰어나가
지나가던 시민군 무장 지프차를 세워
투사회보를 가득싣고 해방의 거리를 달린다
생면부지 시민군 운전사 신바람으로 질주하고
M1소총 무장 시민군 차량 경호를 담당하야
주택가 밀집지대를 샅샅이 헤집으며 전단을 살포하는디
"민주투사들이여 승리의 날이 머지 않았다
광주의 함성이 전국으로 메아리 쳐
각지에서 동참하여 오고 있다 승리의 그날까지
전시민이 단결하여 싸우자 이기자 민주주의 만세를 부르자"
시민들 달려와서 투사 회보를 받아 보고는
갈증에 샘물 만난듯 굶주린 소식에 기갈(飢渴)을 푸는구나
아니리 – 이 날 아침부터 도청앞으로 앰블란스가 들락거리더니 시신들을 갖다놓는디, 어허 이게 웬일이냐. 형상을 알 수 없게 얼굴이 짓뭉개져 있고, 눈알이 튀어나온 사람, 팔다리가 잘려나간 사람, 처참하기 짝이 없는지라... 윤상원 비통한 마음으로 잔혹한 군부독재 세력과 그 하수인인 공수부대의 만행에 다시한번 치를 떨었지.
윤상원 생각에 작금의 상황은 계엄군의 일시적 후퇴라, 분명 진압작전이 감행될 것인즉, 대책을 강구코자 도청에 들어가보니, 부지사가 중심이 돼서 지역 유지들로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또 김창길이라는 대학생이 나서 ‘학생수습위’를 구성해서 협상안을 들고 상무대를 방문했거날, 계엄사는 ‘무조건 무기반납’만 요구하고, 관변 대책위원들 수습 방안이 시민들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라, 윤상원 녹두서점으로 돌아와 대책을 강구할제, “강력한 지도부를 세우려면 시민들 투쟁열기를 모아낼 대규모 궐기대회가 필요하다.” 하는데 착안을 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디, 시간이 촉박한지라 좀 서둘렀던가보더라.
빠른 잦은모리
우선 당장 급한 것이 앰프와 스피커등 방송장비의 확보이고
그다음에 급한 것이 연사들의 섭외이고
또 그 다음에 급한 것이 플래카드와 대자보 제작하는 일인디
무엇보다 급한 것은 궐기대회 자체를 전 시민에 홍보하는 일이라
"이번에 내는 투사 회보는 아예 시민 궐기대회 홍보용으로 만들자"
밤새워 준비한 후 다음 날이 되었는디 윤상원이 하는 말이
"전남대학 스쿨버스를 가두 홍보에 이용하면
시민들이 신뢰할터 스쿨버스를 빌려오자"
전남대로 달려간즉 버스는 놓여있는디 차량 열쇠가 없구나
김상집이 나서더니 군대서 익힌 기술로 차량 범퍼를 열어젖히고
지지 지지 지지 지지 부르릉 시동을 걸더니만 바로 끌고 나와서는
남녀교대로 마이크를 잡고 궐기 대회를 홍보하니 효과가 대단하구나
이때여 박효선은 극단 광대 단원들과 도청 인근 건물 벽에다
대자보를 부착하니 궁금한 시민들이 빽빽하게 모여든다
이때여 송백회 여성들은 화가 홍성담과 함께
색색이 페인트로 플래카드를 제작하여 도청 담장 곳곳에다 거는디
"비상계엄 해제하라"
"유신 잔당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을 처단하자"
"광주를 사수하자"
오후 3시가 되어가니 도청 앞 광장이 인산인해를 이루거날
수습위가 약속을 어기고 방송 장비를 안내어주니
기민한 궐기 대회팀 스쿨버스 앰프를 떼내어
분수대 위에 설치를 했는디 스피커가 안나오는구나
쩔쩔매고 있을적에 어떠한 사내가 뛰쳐나와 수리를 자청하는디
"나가 광주 전파사 주인이요 나가 고쳐보것소"
"나가 전남 전파사 사장이요. 나가 손대보것소"
"어허 여그 모인 사람이 모다 광주시민잉께, 나가 고쳐보것다는디..."
"옴매, 여그 모인 사람이 싹다 전남도민인디, 나가 손대보것당께."
광주 전남이 힘을 합치면 안될 일이 없는지라
뚝딱 뚝딱 거뜬히 수리를 해놓니
"아 아, 마이크 시험 중, 마이크 시험 중"
극단 광대 김태종 사회로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된다
아니리 -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는 무려 15만명이 운집, 각 부문 대표들과 시민들이 나와 투쟁 열기를 한껏 고취시켜 대성공을 거뒀지.
[넷째마당 : 투쟁(鬪爭)이냐 투항(投降)아냐 - 항쟁지도부 결성]
다음날 5월 24일, 학생수습위원회는 무기 반납 문제를 둘러싸고 계속 진통을 겪고 있는디, 서둘러 무기를 반납하자는 김창길 측과 최소한의 요구조건이 관철된 후라야 반납할 수 있다는 김종배 측과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것다. 그런 중에 제2차 범시민궐기대회가 다시 수만 관중 앞에서 개최되는디, 관변 수습위가 대회중 전기를 아예 끊어버리고 앰프 시설을 못쓰게 만드는 등 노골적으로 방해를 하니,
세마치 진양
분개한 청년들 단상에 올라
"학살 책임자 처단하라" "피의 댓가 보상하라"
외칠적에 갑자기 후드드 드드득 쏴
군중들 비를 피하느라 우왕좌왕 소란하니
사회자 심정도 처연해져
"지금 이 빗방울은 원통히 가신 영령들이
흩뿌리는 눈물이오"
군중들 다시 숙연히 앉을적에
한청년 단상으로 뛰어올라
"동포여 민주제단에 흩뿌린 우리 피를
헛되이 하지 마소서
이땅에서 독재를 추방하고
참된 민주주의 꽃피우게 하기위해
우리 80만 광주 시민들은 핏빛 물들은
아스팔트 위에 무참히 죽어가는
시쳇더미 위에 죽음으로써 외칩니다
삼천만 애국동포여 모두 일어서라"
피를 토하듯 절규를 한다
아니리 – 대회 막판에 군중들은 전두환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화형식을 거행했것다.
이때여 도청 부지사실에 마련된 수습대책위에서는 무기 반납 문제를 놓고 여전히 논란이 거듭되거날, 도청 무장시민군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상황실장 박남선이 참다못해 회의장에 난입,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광주시민의 피를 팔아먹는 짓이야. 투항하자는 자들은 돌아가라.” 분연히 호통치는 장면을 윤상원이 목격했지. 이날 늦게 윤상원이 따로 박남선을 찾아가 신분을 밝히고 소신을 피력하는디,
단중모리
윤상원이 말을한다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항복하자는 것이라
그리되면 아무런 댓가없이 엄청난 피해만 자초할터
지금 밖에서 궐기대회를 열고있는
청년 학생들과 도청 내 무장 시민군이
하나로 힘을 합쳐 알량한 저 수습 대책위의
대책없는 무기반납 잘못된 방안을 저지합시다"
박남선이 듣더니만
"우리 무장 시민군을 보면 대학생아(애)들은 별로 없소
불은 지놈들이 질러놓고 목숨이 위험해지니까
모다 내빼버리지 않았소 허나 형씨를 보아하니
그런 비겁자들하고는 뭣이 달라도 좀 다른 것 같소잉
어디 한번 힘을 합쳐 봅시다 의기투합하여
뜻을 함께 하기로 굳게 결의하니
도원결의(桃園結義)아닌 도청결의라
아니리 – 윤상원은 박남선 외에도 학생위원회 김종배 같은 용기 있는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투쟁지도부를 세우는 데 대해 긴밀히 의견을 나눴것다. 5월 25일, 해방광주 나흘째가 되었는디, 도청 분위기가 점차 강경한 투쟁 쪽으로 선회함을 감지한 계엄 당국은 이를 교란할 목적으로 이날 아침 소위 독침사건을 조작하였것다. 도청 안이 종일 뒤숭숭한 가운데, YWCA 2층에서는 정상용 윤상원 등 청년 운동권이 광주 재야 민주인사들을 모시고 사태수습 방안을 논의할제, 교수님 한 분이 호소하는디,
중모리
"청년들은 들으시오 어쩌다가 우리 광주
이런 변을 당했는지 하늘도 무심하고
원통하고 분하여라
그리허나 여보게들 무고한 시민들이
더 이상 피를 흘려서는 아니되오
부디 무기를 회소해서 엄청난 참변을 막아주오"
청년들이 이말듣고 "어르신네 듣조시오
무기를 먼저 반납하면 협상에 절대 불리하오
몇일간만 더 버티면 저들이 먼저 붕괴되오
그리허니 어르신들 싸움을 우리 청년들이
앞장서 할 것이니 부디 우리를 지원해서
그렇게도 염원하던 민주화를 이룹시다"
아니리 – 이렇듯 서로 간곡히 호소하니 결론을 못내리고, 이날 오후 3시 궐기대회가 속개될제, 시민군 대표가 나와 연설을 하는디,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너무나도 무자비한 만행을 더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시민 여러분, 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잔인무도한 만행을 저지르고 자기 국민을 학살한 계엄군이 폭도입니까?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은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잦은모리
이날밤 도청에서는 청년권 주도하야 투항파를 구축하니
수습위는 해체되고 투쟁위원회가 새로 결성되는구나
위원장은 조선대생 김종배가 맡고
내무 담당은 부위원장 허규정이가 맡고
외무 담당 부위원장 정상용이가 맡고
대변인은 국민연합 윤상원이가 맡고
상황 실장 골재업자 박남선이가 맡고
기획 실장 들불 야학 김영철이가 맡고
기획 위원엔 이양현과 윤강옥을 보강하고
홍보 부장은 극단 광대 박효선이가 맡고
민원 실장은 교사 출신 정해직이가 맡고
조사 부장에 김준봉 보급 부장에 구성주
이같이 선임하니 광주민중 민주항쟁 지도부라
도청내 경비대를 대학생 병력으로 전격교체하고
장기적인 대치상황 대비키로 하는구나
아니리 -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고 5월 26일, 해방광주 닷새째가 되었는디, 새벽부터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 되었던가 보더라.
휘모리
새벽 다섯시경 상황실 무전기가
삐- 삐- 삐- 삐- 타신을 보내온다
"여기는 농성동 지금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진입하오"
도청이 발칵 뒤집히더니만
"비상 전병력 출동준비"
시민군 출동하여 농성동으로 질주
계엄군 탱크와 대치하는구나
아니리 – 이 날 마침 도청 안에서 밤을 새던 신부 변호사 등 재야 수습위원들이 “몸으로라도 탱크를 막겠다”고 밖으로 나선 바 ‘죽음의 행진’이라. 다행히 충돌은 없었으나 계엄군은 무력 진압을 계속 통보하거날, 이 싸움은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싸움인지라, 항쟁지도부는 시민들에게 계엄군 진입 가능성을 사실대로 알렸것다.
[다섯째마당 :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이 날 오후 윤상원은 항쟁지도부 대변인 자격으로 외신 기자회견을 가진 바, 윤상원은 회견에서 광주시민의 목표는 잔악한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으며, 압도적인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저항함으로써 야만적 군부세력이 치러야 할 댓가를 최대화하는 ‘고립지역 사수전략’을 피력하고, 현 사태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주한미국대사와의 대화를 공식 제안하는 등 항쟁의 대의 명분을 비장하게 설명함으로써, 볼티모어 썬(SUN)지 브래들리 마틴 기자를 비롯한 외신기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고 하더라.
날이 어두워지면서 계엄군 진입이 기정사실이라, 도청 안은 긴장과 불안에 쌓였는디, 당황하던 관변 수습위원들은 학생들에게 피신을 권유타가 도망치듯 빠져나가고 이제 남은 사람들끼리 여성부에서 준비한 식사를 마지막으로 함께 하니 ‘최후의 만찬’이라. 식사를 마친 후 윤상원 일어서며,
중모리
"이제 최후의 결전의 시기가 왔소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은 밖으로 피하시오"
이말들은 여성들이 꼼짝않고 있는지라
윤상원이 비감해져서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오
여러분은 이 과정을 다 지켜 보았소. 이제 그만 나가시오"
이때여 어떤 고등학생 하나 울부 짖으며 나오다니
"우리 누나가 공수놈들한티 잔인하게 학살되었소
원수를 갚고야 말것이니 함께 있게 해주시오"
윤상원 기가막혀 "너의 심정은 알것다만
살아남아 증언할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것느냐
너는 꼭 살아서 너의 형들이 오늘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후세 만대에 전해다오"
아니리 –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았것다. 끝까지 남은 사람들 면모를 볼작시면 거의가 일용노동자에 소상인 종업원 등 근로 빈민층이 주력이라. 광주항쟁의 주체세력은 학생에서 시민으로 그리고 노동민중으로 옮겨갔것다.
진양조
사방은 칠흑같이 쥐죽은듯 적막할제
시민군들 어느결에 총을 꼭 껴안고는
살풋 잠이 들었구나
그때여 윤상원은 초조한 마음을 달래느라
담배 한대 피워무니
지나간 젊은 날들 회한이 밀려온다
가난한 농부로 왼종일 땡볕에서
일만 하시던 아버지 어머니
큰아들이 좋은직장 취직하자
집안살림 이제 다 폈다면서
뛸 듯이 기뻐하던 아버지 어머니 내동생들
좋은직장 때려치고 노동자로 살아가자
병석에 누워 실망하시어
시름만 더 싶어지신 어머니
기순누이 만나 들불 야학 동참해서
교사들 학생들한데 어울려
동고동락 하던일과 광대패 벗글과
탈춤추고 풍물치고 마당판을 꾸미던일
녹두서점 공동으로 운영하며
온갖 사람들 선후배들 다 만나서
민주화 운동 앞장선 일
소리내력 판벌여서 좌충을 휘어잡아
한껏 웃기고 울리던 일
전민노련 동지들과 독재 억압 떨쳐내고
평등 세상 만들고자 밤새워 토론한 일
이제와 생각하니 두눈에 눈물이 핑 돌더니
쭈루루루루루루
눈물 씻고 일어나서 밤하늘 바라보며
다짐을 하는구나
소리내력 진양조 사설 겹쳐 연행된다
어머니
고향에 돌아가요 죽어도 나는 돌아가요
천갈래 만갈래로 육신 찢겨도 나는 가요
죽음 후에라도 기어이 돌아가요
저 벽을 뚫어 저 담을 넘어
원혼되어 저 붉은 벽돌담을 끝끝내 뚫고
넘어가요 어머니
죽음 후에라도 기어이 돌아가요
독백(獨白) - 이 싸움은 분명 패배요 전멸 당할 것이지만, 그냥 이대로 총을 놓고 항복하기에는 지난 항쟁이 너무나 장렬했다. 항쟁을 완성시키자면 누군가 여기 남아 도청을 사수하다 죽어야만 한다. 나는 그 길을 택하리라.
창조(唱調) - 이때여 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어떤 여성의 목메인 절규가 터져나오는디,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모두 일어나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애절한 울부짖음에 광주시민 모두 잠을 못 이루고 일어나 깨어있을 적에 “비상! 비상!”
잦은모리
새벽 두시 삼십분경 계엄군 진입한다
외곽에서는 포성소리 지척에 들리난디
조명탄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히더니
탱크를 앞세우고 계엄군 진입한다
지원동에서 광주천 학동에서 전대병원
백운동에서 한일은행 화정동에서 양동
서방에서 계림국고 압박해 들어올제
누구든 얼씬거리면 무조건 사살이라
새벽 세시 삼십분 계엄군 장갑차가
금남로로 진입 도청을 사방에서 포위!
서치라이트 확!
아니리 - "폭도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는 현재 완전히 포위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탕". "쨍그렁!"
엇모리
총성 한발 울리더니 탐조등 유리창을 박살을 내는구나
캄캄한 어둠속에 중무장한 계엄군 일제사격 개시된다
자동화기 콩볶는 소리 천지가 진동
공수대원 일개조가 도청 뒷담을 넘어
시민군 등 뒤에서 무차별로 난사한다
또 다른 공수대원 창문 턱까지 접근 수류탄을 투척한다
또 다른 공수대원 화염방사기를 광폭하게 분사한다
대항하던 시민군들 실탄마저 바닥이라, 하릴없이 죽어갈게
희뿌연 연기 속에 어슴프레 새벽이 동터 오는구나
중모리
"불꽃같이 살다간 벗이여 왜 말없이 눈을 감고 있는가
그대는 정말 죽었는가 믿어지지않는 너의 죽음 앞에
나는 믿는다 그대가 살아 올 것을 그대가 불꽃으로 다시 일어
훨 훨 타오르는 들불로 살아 이내 가슴 텅 빈 가슴 속에
한송이 꽃으로 피어날 것을 나는 믿는다 갈망한다"
<들불야학 학당가>
우리는 새벽이다 밝아오른다 심지에 불당기고 앞서나가자
친구 친구 나의 친구 들불 들불 들불 들불 들불이 되어
아하 겨레의 새 아침이 동터온다
우리는 새암이다 솟아오른다 신들메를 고쳐매고 달려나가자
친구 친구 나의 친구 들불 들불 들불 들불 들불이 되어
아하 민족의 새역사다 통터온다
우리는 불꽃이다 퍼져나간다 땀과 눈물 삼키면서 함께나가자
친구친구 나의 친구 들불 들불 들불 들불 들불로 번져
아하 민중의 새세상이 동터온다
동터온다
[닫는 마당 :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맹세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