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소리로 읊다
창작판소리 [남한산성]은 남한산성의 장구한 역사와 이 땅에 살아온 인간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남한산성을 단순한 역사적 배경으로 삼는 것을 넘어, 산성이 목격하고 기억해온 시간을 생생히 되살려낸다. 작품의 전반부는 천오백년 역사를 지켜온 성의 돌들이 일어나 산성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며, 후반부는 병자호란 때 산성이 목격한 주화파와 항쟁파의 갈등 속에서 국가와 개인, 그리고 선택의 문제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한산성이라는 공간이 담고 있는 역사의 굴곡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치와 통찰을 전하는 작품이다.
수원에는 화성 옛모습이 오롯이 남아있네.
신라의 서라벌엔 명활산성 있었으며, 공산성 부소산성은 백제의 산성인데,
청주의 상당산성, 단양의 적성산성, 상주의 견훤산성은
한강 유역 패권을 각축하던 삼국의 요충지라.
포천의 반월산성은 궁예의 웅거지요
망국의 한이 서린 덕주산성은 월악에 남아있네.
의주의 백마산성 평양의 자모산성 북방의 방어지요
동해 태백의 암벽에는 두타산성이 둘렀는데,
경도 인근 서해안은 강화산성이 받쳐있고
남방 왜구 향해서는 동래의 금정산성 엄연히 버텨 섰다.
성이 많다 보니 재미난 이름도 다 있구나.
닭발처럼 생겼다고 계족산성, 시루처럼 생겼다고 시루메산성
아차하면 죽는다고 아차산성, 요강처럼 생겼다고 요강산성
마고할멈이 쌓았다고 할미산성, 성 쌓는데 3년 걸려 삼년산성 되었다네.
이러한 산성 중에 역사도 오래 되고 규모도 제일 크고
축성 기법이 다양한 산성이 바로 남한산성이라.
어화 사람들아 지금부터 이 광대가
남한산성 이야기를 판소리로 짤 것이니,
아는 사람은 아는대로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대로
자세들 편히 하고, 핸드폰들 다 꺼놓고, 바쁜 일 다 잊어버리고
추임새 실컷 넣어가며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
판소리 <남한산성> 1
아니리 -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0여Km 떨어진 한강 남쪽, 경기도 광주 성남 하남 세 지역에 걸쳐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는 오래된 산성이 자리잡고 있으니, 이곳이 바로 남한산성이라, 넓은 한강을 해자로 삼고 있으니 산성의 방략과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가는 일이렷다. (‘해자垓字’가 뭣이냐 하면, 적이 들어올 수 없게 성 주위를 주욱 둘러파서 만든 도랑못인데, 남한산성은 해자가 따로 없고 한강을 해자로 삼았다 이 말이여.) 이 남한산성 형세를 살펴볼작시면
세마치 - 서북쪽은 깎아지른 절벽과 한수로 막혀있고
동남쪽은 치솟은 봉우리가 영호남을 제어하여
큰 검과 작은 검이 지키고 서있으니
험준한 산세는 싸우지 않고도 능히 이길 수 있는 땅이라.
바깥쪽은 험하고 가파르나 안에 들면 낮고 평평하여
산꼭대기에 관을 쓴 듯, 광주리를 엎어놓은 듯
천혜의 요새요 하늘이 만든 성곽이라
가히 경도의 보장지요 호국성지로구나.
아니리 - 이 남한산성이 대체 언제 축성되었는고 하니 몇가지 설이 있는 바, 백제사에는 “시조 온조왕이 한산 아래에 나아가 성궐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온조가 쌓은 성이 남한산성이었다 하는 설이 있는가 하면, 삼국사기에는 “신라 문무왕 12년(서기 672년)에 한산주에 돌로 성을 쌓았는데 낮이 길어서 주장성이라 불리웠다” 하는 기록이 있어 신라 때 처음 축성된 것이라는 설이 있것다.
어느 설이 옳은지는 광대가 단언키 어렵고 이런 것을 밝히는 건 학자들 몫이렷다. 허나 판은 이미 벌어진 소리판이라, 남한산성 유래와 역사를 한대목 엮어보는데, 문무왕 때 얘기부터 한번 엮어보것다.
중중모리
신라의 김춘추 무열왕과 뒤를 이은 문무왕이
당나라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후에
당나라가 야욕을 드러내어 고구려 백제의 옛땅을 차지하고
신라의 영토를 침입하니
분개한 문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에 대적할 제
한강 유역의 중요성이 대두된즉 산성 축성이 시급하다
남한의 산세를 살펴본즉 천혜의 요충지라
주장산 꼭대기에 석성을 높이 쌓고 대규모 창고를 짓는데,
길이가 200척에 너비는 60척에 벽체 두께만도 6자요
기와 한 개의 무게가 30근이 넘는지라
수만석의 군량미와 무기를 비축하니
방어의 거점이요 난공불락의 요새로다
적의 세가 강할 때는 성곽 위로 피하고
적이 지치거나 틈을 보이면 잽싸게 나아가 공격하고
적이 우회하면 보급로를 차단하니
제아무리 강한 당나라 군사라 하더라도 속수무책이라
나당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끝이 나고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의 땅을 모두 확보하게 되었더라.
아니리 - 고려시대에도 “몽고 대군이 ‘광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광주부사 이세화가 군민과 더불어 대항하여 성을 지켰다” 하는 기록이 있는 바, 이때의 광주 성이 바로 남한산성이렷다.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일장성-주장성 수축 논의가 시작된즉, 태종은 고을마다 산성을 수축하고 창고를 지어, 유사시 주민을 대피시켜 방어하는 계책을 세웠으니 ‘산성입보(山城入堡)’ 전략이라.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강화 교동산성과 광주 일장산성을 수축하였것다. ‘남한산성’이란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조선왕조 실록 선조 26년조, 임진왜란이 일어난 바로 다음해라. 의주로 피난갔던 임금이 환도하여 도성 방어대책을 논의할제 명신 유성룡이 남한산성 수축을 주장하였으나 민생이 피폐하여 시행되지 못하고, 수축 논의가 다시 고개를 든 것은 인조반정 이후렷다.
평중모리
인조반정이 무엇이뇨.
광해군이 자기 친형인 임해군을 살해하고
대북파 이이첨이 계축년 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증살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한즉 폐모살제의 패륜이라!
서인세력 이귀는 김류 김자점, 이괄과 공모하여 무력정변을 기도,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 종을 옹립하니 이것이 인조반정이라!
반정공신 논공행상 등급 나누어 행할 적에
큰 공 세운 이괄이 김류와 불화하여 2등공신 대접받고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밀려나니 불만이 팽배할제
돌연 금부도사와 선전관이 영변까지 급래하여
이괄을 추포하려 하니, 역모의 무고라!
잦은모리
이괄이 분개하야 금부도사와 선전관의
목을 댕겅 베어버리고 반란을 일으킨다
휘하의 전병력 1만여명을 이끌고 한양으로 향할 적에
“평양은 도원수 장만이 주둔한즉 이를 피해 샛길로 진군한다”
황주 신교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개성을 지나 임진에서 또한차례 관군을 대파하고
불과 보름만에 경도 한양에 다다른즉
임금과 대신들이 황황 급급하야
도성을 빠져나와 공주 공산성으로 급히 도망을 치니
한양이 통째로 이괄의 수중에 들어왔구나
아니리 - 이괄은 도성 점령 하룻만에 도원수 장만의 군사에게 길마재에서 대패하고 남쪽으로 도망하였다가 부하장수에게 목이 잘리어 그 수급이 인조에게 바쳐진즉, 난은 평정되었으나 외침도 아닌 내란으로 국왕이 공주 공산성까지 도망을 쳤으니 도성 방비의 허술함이 여지없이 드러났것다. 산성 수축을 둘러싼 의론이 분분터니 임금이 하교를 내리는데, “남한산성을 유사시 종묘사직을 보전하는 행궁처로 삼을 것인즉, 공조판서 이서는 총융사의 책임을 맡아 남한산성을 개축하라.”
중중모리
총융사 이서가 명을 받들어 군병을 징발할 제
승려 벽암 각성대사를 도총섭으로 임명하니
전국 8도 승군들이 득달같이 모여든다.
경기도내 양주 광주 여주 죽산의 군사들을 입방군에 편성하고
온조왕이 쌓았다는 옛 토성 자취 따라
문무왕 때 쌓았다는 주춧돌 흔적 따라
남한산 주봉인 청량산을 기축으로 삼아
북으로는 연주봉, 동으로는 망월봉
남으로는 한봉을 연결하여 테뫼를 두를 적에
성돌을 괴아라, 성돌을 괼 적에
바닥을 넓고 깊게 파서 잡석을 가득 채워라
기초를 든든히 한 연후에 성돌을 괴아가니
옥수수 알갱이 모양처럼 사나운 짐승의 이빨처럼
한번 쌓은 성돌은 절대 빠지지 않는구나.
성벽을 쌓아라, 성벽을 쌓을 적에
서북쪽은 승군들이 맡아 쌓고 동남쪽은 관군들이 맡아 쌓을제
산등성이 굴곡을 따라 성곽을 높이 쌓아놓니
적군이 어디도 숨을 데 없이 한눈에 들어오는구나
여장을 쌓아라 여장을 쌓을 적에
한 타씩 분리해 쌓아놓니
적의 포탄에 맞더라도 한번에 무너질 염려가 없구나.
대문을 세워라, 대문을 세울 적에
동 서 남 북 4대문을 두되
암문을 따로 두어 비밀 통로를 확보하라
사찰을 지어라, 8도 승군 머물러 있을 사찰을 새로 지을 적에
무기 화약 저장해둘 창고까지 지었구나
행궁을 지어라, 남한산성은 행궁처라 행궁을 지을 적에
상궐 하궐에 좌전 우실 빠짐없이 갖췄구나
장대를 세워라, 봉우리마다 장군의 지휘소 장대를 세워두고
산기슭 낮은 터에는 군사들을 조련시킬 연무관을 지었구나
갑자년 9월 시작된 공사가 병인년 7월에 끝났는데
성의 둘레가 6297보요, 여장의 타가 1897개요
우물이 80개, 샘이 45개인데
광주읍의 치소를 산성 내로 옮겨 놓으니
은연히 하나의 읍성이요 커다란 진과 같더라
아니리 - 남한산성 개축 당시 동남쪽 성벽을 맡아 관군을 지휘한 축성도감이 이회라는 장수인데, 이회에 얽힌 설화가 전해오는 바, 하나는 ‘매바위 설화’이고 하나는 ‘청량당에 얽힌 유래’라. 혹자는 이회는 단지 전설일 뿐 공식기록에는 없는 인물이라고 하나, 수어장대 앞마당에 매바위가 있고 또 청량당이 엄연히 존재하거날, 전래해온 민간 설화를 광대가 그냥 넘어갈 수 있것느냐. 판소리로 한번 짜보는데,
잦은모리
남한산성 개축할 제 주어진 기한은 2년이라
서북쪽은 벽암대사 승군들이 맡아 쌓고
동남쪽은 축성도감 이회의 책임이라
서북쪽은 가파르나 산세가 평탄함에
동남쪽은 완만하나 협곡이 많은지라
구불구불 계곡 따라 진척이 더디구나
서북쪽 승군들은 단련된 인력들이 일사불란 움직이거날
동남쪽 관군에는 동원된 백성들 끼어있는데다
물자가 동이 나니 더욱 진척이 어렵구나
걱정이 된 부하 부장이 조심스럽게 아뢰는데
“대장, 이대로 가다가는 대장께 책임이 돌아갈 것이외다.”
이회 도감 하는 말이
“하지만 대충 쌓다가는 성벽이 무너져 큰 사고가 날 터,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니 제대로 된 돌을 골라 빈틈없이 쌓으라.”
이회 도감 거동보소
부인 송씨와 소실 유씨가 집과 가산을 내놓으니
이를 몽땅 처분하여 군사와 백성들 품삯을 충당하며
전심 진력하였으나 애석하구나,
공사기한이 다 되도록 축성을 완공치 못하니
이회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모함하여 상소를 올렸구나
아니리 - 임금이 총융사 이서를 불러 공사 지연을 질책하니, 심기가 불편해진 이서가 수어장대에 나아가 축성도감 이회를 문책하는데, “내 너를 믿고 국가 대사를 맡겼거날, 어찌 태만히 하여 불충을 저질렀는고?” 이회가 답하기를 “동남쪽은 협곡이 많아 기초를 단단히 하느라 지체되었을 뿐 태만히 한 것이 아니오이다.” “이놈, 네가 주색잡기나 하면서 나라의 재물을 착복한 것 아니더냐?” 이회가 어이없어 “나으리,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이오. 그런 일은 절대 없소이다.” “네 이놈, 국고를 유용하고 축성을 허술히 한 너의 죄를 알겠느냐.” “아이고 나으리, 억울하오. 죄를 묻더라도 제가 맡은 성벽을 먼저 살펴보고 나서 물어주시오.” “이런 괘씸한 놈, 내 이놈을 임금께 불충한 죄를 물어 참수형에 처하겠다. 여봐라, 어서 저놈을 참하라.” 추상같은 명령에 한 군졸이 썩 나서서 칼을 번쩍 치켜드니
진양조
이회가 기가 막혀
“아이고 나으리, 억울하오, 원통하오.
내가 죽은 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나에게 죄가 있는 것이오.
어떤 괴이한 일이 일어나면 내 죽음은 원통한 것이오.”
비통히 하소할 제, 무정한 장검이 번쩍!
이회의 머리가 댕그렁! 땅에 떨어져 뒹굴 적에,
베어진 목에서 붉은 피가 왈칵! 하늘로 뻗치더니,
저것 봐라! 매 한 마리가 푸드드드득!
수어장대 앞 큰 바위로 날아 앉더니만 꺼어억! 꺼어억!
둘러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목을 바싹, 옴추리고 있을 적에
저 매의 거동봐라, 사람들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다 푸드드드득!
바위를 박차고 날아올라 둥실 높이 떠서
이회의 시신 위를 몇 번이나 감싸고 돌더니마는
동남쪽으로 훨 훨 날아가거날
그제야 사람들이 정신 차려 바위 앞으로 다가가 보니
매가 앉았던 그 자리에 그 매의 발자국이 선명히 남았더라.
아니리 - 이 곳이 매바위라. 사람들은 이회의 죽음이 억울했음을 알게 되었것다. 한편 이회의 처 송씨과 첩 유씨는 군사들 먹일 식량과 물자를 구해 집을 떠났다가 삼전도로 건너오던 중 남편이 죽은 사실을 알고 망연자실, 싣고온 쌀을 강물에 던져버리고 빠져 죽은즉 그곳을 ‘쌀섬여울’이라고 한다는 것이여. 그 후 조정에서는 청량당이라는 제각에다 산성 수축에 공로가 큰 벽암 각성대사와 억울하게 참수형을 당한 횡수대감 이회의 영정을 모셔 제사를 올려주었는데, 비 오는 날이면 강가에서 여인네들 울음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산 꼭대기 수어장대까지 들린단 말이여. 그래 광주유수가 남한산 터주 만신들을 불러 청량당 앞 향나무 아래서 큰 굿판을 벌여주고, 두 부인의 영정을 함께 모신즉 그제야 통곡소리가 그쳤다는 거여. 저 독일 라인강가 로렐라이언덕 전설보다 더 슬픈 전설이여.
각설하고, 이렇듯 남한산성을 수축하던 그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살펴볼작시면
중머리
명나라가 임진왜란 출병 이후 국력이 쇠퇴하자
건주여진 추장 누루하치가 부족을 통합하여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 땅을 침범하니
분개한 명나라가 후금 토벌을 나설적에 조선에 공동 출병을 요구한즉
당시 임금 광해군은 대륙의 정세를 간파하고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 입장을 견지한다.
도원수 강홍립을 불러 밀령을 내리는데
“그대는 1만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명군을 도우러 가되,
추후 형세를 판단하여 향배를 달리 하라.”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하자
강홍립은 후금에 투항하고 화의를 도모하였구나
이때여 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후금을 배척하며 친명 사대정책을 주장하니
명나라와 대치한 후금에게는
가도의 모문룡과 조선국이 배후의 위협이라
누루하치 뒤를 이은 후금의 왕 홍타이지(皇太極)가
정묘년 1월 아민으로 하여금 조선을 침공하게 하니
정묘호란 이로구나
엇모리
후금군의 주력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하고 남쪽으로 내려갈제
병력의 일부로써 가도를 먼저 공격하니
무모한 모문룡은 신미도로 패주한다.
후금군 위세봐라 안주성을 점령하고
평양 거쳐 황주까지 남진을 계속하니
임금은 강화도로 급히 파천하고
세자는 분조하여 전주로 피란가니
무력한 조선 조정은 전쟁을 수행할 여력조차 없구나
이때여 강홍립이 강화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고 화친을 종용한다
“후금의 목표는 요동을 확보하여 명을 치는 데 있은즉
모문룡만 제거하면 조선과의 전쟁은 원치 않소이다“
궁지에 몰린 인조가 화친을 수용하는데
정묘년 3월 3일 서문 밖에 제단을 쌓고
흰 말과 검은 소를 잡아 그 피를 내어 하늘에 제 지낸 후
양국 대표들이 차례로 놋사발에 입을 대고
말의 피를 마시니 삽혈의 의식이라.
“금국과 조선국은 형제의 나라라,
만일 한쪽이 다른쪽을 원수로 삼아
화친을 위배하여 군사를 일으킨다면 황천이 화를 내릴 터
양국이 동심동덕하야 공도로 나간다면
용천이 보우하사 길이 태평을 누리리라.”
강도(江都)의 맹약이로구나.
아니리 - 이렇듯 정묘호란은 형제의 맹약으로 일단락되었는데, 광해군의 중립 외교노선을 비판하면서 무력으로 집권한 인조가 친명사대만 앞세우다가 오랑캐의 침략으로 형제의 맹약까지 맺게된즉 반정의 명분이 무색하게 되었것다. 이후 수년 동안 조선은 후금에 막대한 세폐를 바치고 중강의 무역을 허용하였는데, 후금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져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까지 공격하며 명나라를 위협하는데, 조선에 금 1만냥과 전마 3000필에 정병 3만을 요구할제, 을해년 12월 인조의 정비인 인렬왕후가 승하하고, 그 다음해가 병자년이라.
세마치
홍타이지가 국호를 고쳐 대청(大淸)이라 칭하고
연호를 숭덕으로 바꾸고, 관온인성황제를 자칭하며
각국 사신을 초빙하야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할제
조선의 춘신사들이 끝내 무릎을 꿇지 않고 굴함이 없으니
기분이 상한 홍타이지가 인렬왕후 조문을 핑계로
용골대와 마부대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황제 즉위와 존호를 알리며 군신의 의를 요구한다
중머리
조선 조정은 사신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 접수를 거부할제
장령 홍익한이 상소를 올리거날
“저들은 분명 맹약을 어기고 침략의 구실을 찾는 것일진대
사신들을 붙잡아 황제 참칭의 죄를 물어 목을 벰으로써
예의의 소중함과 절의의 값짐을 깨우쳐줌이 마땅하오.”
모화관에 머물러 하회를 기다리던 청국 사신들이
내심 걱정 하는 중에 왕후의 조문 날짜가 되었구나.
잦은모리
용골대와 마부대가 공연히 우쭐우줄
거만을 가장하여 궁안을 들어서니
접반사가 그들 일행을 어떤 군막으로 안내하는데
제물이 진설되어 있는지라 한참 제례를 행하는 중에
때마침 샛바람이 윙 몰아치더니 장막이 펄쩍 열리거날
용골대가 놀라 둘러보니 다리 위에 빈 장막만 놓였구나
불현듯 의심을 품고 주변을 살필 적에
대궐 한편에는 포수들이 총을 들고 모여 있고
궁궐 숙위 금군들이 무기를 들고 왕래하니
용골대 일행이 깜짝 놀라 서둘러 군막을 벗어나
슬금슬금 물러나와 허겁지겁 도망친다
그때여 구경나온 길거리의 백성들이 저들을 보더니만
“오랑캐 놈들이 도망을 친다. 저 놈들을 붙잡아라.”
냅다 소리를 지르니, 다급한 오랑캐들 엎어지고 자빠지며
“걸음아 날 살려라.” 제각기 달아날제
길가의 아이들이 돌맹이며 기왓장이며 마구 던지며 쫒아오니
다급한 용골대가 민가로 몸을 피해
아무 말이나 훔쳐타고 냅다 도망을 치는데
“아니, 이놈의 말이 왜 앞으로는 아니가고 자꾸 뒤로만 가느냐?”
“아이고 대장님, 삼국지 조조도 아니면서 어째 말을 거꾸로 타셨소.”
“야 이놈아, 말 거꾸로 타는 것이 마상 기예중 최고의 재조니라.
언제 옳게 타겠느냐, 말 모가지만 쏙 빼어다 얼른 뒤에다 꼽아라.”
혼자 줄행랑을 놓으니, 부하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뿔뿔이 흩어져 혼줄 빠지게 내빼는구나
아니리 - 이 날의 엉뚱한 사건으로 청의 사신들은 조선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갖게 되었는데, 설상가상 이들이 도망치던 중 평안도 관찰사에게 가던 유문을 빼앗아 자기 나라로 가져간즉, 청태종은 조선이 자기네를 여전히 奴賊-오랑캐로 칭하고 있음을 알고는 분개하여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킬 결심을 하게 되었것다.
조선 땅에 전운이 감돌면서 불길한 천괴와 변고가 잇달아 일어나는데, 산등성이 바위들이 옮겨앉고 오리 황새 개구리들이 떼를 지어 싸우고, 목릉(선조임금)과 혜릉(인목대비)에 벼락이 치고, 민심이 흉흉하거날, 임금과 상신들은 화를 막기 위한 아무런 계책도 없이 공연한 부역만 일으켜 허송세월하고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도원수 김자점의 무능과 독선이라.
평중모리
도원수 김자점이 주장한다. “청국의 침입을 막자면
서북로의 방어체제를 산성 중심으로 재편해야 할 것이오.“
영의정 김류가 동의한즉 서둘러 추진할제
“의주의 진은 즉각 백마산성으로 옮기고
안주와 평양의 진은 자모산성으로 옮기라.
황주의 진은 정방산성으로 옮겨 도원수인 내가 직접 관장하리라.”
의주부윤 임경업이 반론을 제기한다.
“산성 중심 방어체제는 합당치 아니하오.
만약 침략군이 산성 방어군을 상대하지 않고
곧장 빈 들판으로 진격을 하게 된다면
이는 마치 적군의 침공을 용이케 하기 위해
길을 비워주는 것이나 다름없소.”
서찰을 올렸으나 소식이 깜깜이라.
임경업이 염려되어 남한산성 수어사 이시백에게 상의하니
이시백이 동감하여 임금의 경연에서 의견을 개진한다
“설령 산성이 완성되어도 도내 정예 병정을
외따른 성에 몰아놓으면 적군과는 누가 싸울 것이며,
비어있는 읍성과 중진들은 피폐하게 될 것인즉
서북로의 방어책을 재고해주기 원하오.”
영의정 김류가 눈살을 찌푸리며 하는 말이
“달려오는 기병들을 무슨 수로 대적한단 말이오
이미 산성 수축이 반 넘어 진행된 지금에 와서
새삼 그런 의견을 내놓는 의도를 모르겠소.” 어전에서 면박하니
수어사 이시백이 할 말을 잃고 깊이 탄식 하는구나.
아니리 - 그러던 중 병자년 11월, 청태종 홍타이지가 최후 통첩을 보내 왔는데, 그 내용을 본즉 바로 임경업과 이시백이 우려한 그대로라.
청국조 - 너희가 산성을 쌓고 있지만 우리는 대로를 따라
바로 서울로 진격할 것인즉 어찌 우리를 막아내려느냐?
너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강화도 뿐인데
조선 팔도를 다 내주고 조그마한 섬 하나로 임금 노릇을 하려느냐?
척화를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유신(儒臣)들이라는데
너희가 벼루로 성을 쌓고 붓으로 창을 삼아 내 군마를 막으려느냐?”
너희 왕자와 대신을 대청국에 인질로 보내고
척화를 주창한 주모자를 즉각 압송하라.
아니리 - 조선의 동정을 훤히 들여다보고 하는 협박이거날, 그럼에도 조선 조정은 여전히 대명 사대만을 내세우며 청국의 통첩을 끝내 묵살하니, 분개한 홍타이지가 작심을 하고 이번엔 자신이 직접 나서서 조선 침략을 감행하는데
잦은모리
병자년 섣달 초하룻날
청국군사 7만에다 몽고군사 3만, 한군 2만까지
도합 12만 대군이 심양에 집결한다
황제 홍타이지가 큰 수레에 올라타고
수하의 여러 왕과 패륵들이 기치 창검 휘날리며
주야로 말을 달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랼제
황제 홍타이지가 대갈일성 하되
“선봉장 마부대는 곧바로 진격하여
최단 시일안에 적도(敵都)에 당도하라.“
마부대는 조선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자라
질풍같이 말을 달려 남으로 내려갈제
조선의 중진과 읍성들은 모두 텅 비어있는지라
파죽지세로 서울로 육박한다.
이때여 의주 용골산에서 봉화가 급히 올랐으나
도원수 김자점은 봉화를 믿지 않고 딴전을 피우다가
적군이 평양을 지난 뒤에야 장계를 올린지라
갑작스런 변란에 조정은 황망하여 결단을 못 내리고 우왕좌왕 할제
“청군이 벌써 개성을 지났다 하오.” 급보가 들어오니
당황한 조정은 강도(江都)로 피난키로 급히 결정하였구나
그날 미시에 임금이 남대문을 빠져나가 강화도로 향하려 할제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들이 달려와서 급히 아뢰기를
“청국 장수 마부대가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홍제원에 도착하여
양천강을 미리 차단하여 강화도로 가는 길이 이미 끊겼소이다.”
임금이 하릴없이 다시 성 안으로 들어와서
남대문 누각에 올라가서 사후 대책을 강구할제
이때여 전 철산부사 이여해가 분연히 나서더니
“전하, 청나라 군사와 말들이 필시 피로하고 허기가 졌을 것이외다.
저에게 정병 500을 내어주면 사현으로 나아가
적의 선봉을 맞아 쳐서 기세를 꺾어놓겠소이다.”
영의정 김류가 이말을 듣더니 가소로운 표정으로
“청군이 대체 몇 명인줄 알고 감히 그런 말을 하는고?
500의 군사로 적을 시험하다 전멸당하면 어찌할 것인가?”
이여해가 민망하여 애석하게 물러날제
이때여 이조판서 최명길이 임금께 나서더니
“전하, 신이 홀로 말을 타고 적의 진영에 들어가
무슨 까닭으로 군사를 일으켰는지 담판을 하여 보오리다.
저들이 만일 신을 죽이면 마땅히 말 아래 죽을 것이요
다행히 대화가 통한다면 선봉을 잠시 멈출 수 있은즉
전하께서는 지금 바로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보루와 장벽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피하셔서 변고의 추이를 살피소서.”
임금이 허락하니 최명길이 바삐 말을 달려
청군의 진영에 들어가 마부대에게 따지는데
“여보 마장군, 정묘년 맹약을 저바리고 이리 침공한 이유가 무엇이오?”
마부대가 기고만장 응수를 하는데
“이보 최판, 귀국이 까닭없이 맹약을 더럽혔으므로
새로 강화를 맺기 위해 황제께서 친히 거동하시었소.”
최명길이 달려온 목적이 있는지라
짐짓 내색 않고, 갖고간 술과 고기를 듬뿍 내놓고는
마부대를 붙잡고 논쟁을 벌이며 시간을 지체시킬 적에
휘모리
임금의 거동봐라, 임금의 거동 봐
세자 소현을 대동하고 백관을 수행시켜
수구문을 빠져나와 급히 제쳐 달리거날
군사들은 겁을 먹고 슬쩍 빠져 달아나고
내시들은 핑계대고 뒷걸음쳐 달아나고
궁녀들은 뒤에 처져 슬그머니 도망가고
세자의 말을 몰던 마부까지 달아나고
다급한 어가행렬이 광진나루로 길을 잡아
송파나루 바라보며 한강을 건너랼제
때는 섣달 중순이라 강이 얼어 붙었거날
살을 에는 찬바람에 눈보라는 몰아치는데
사공이 횃불 들고 얼음 위를 앞서 걸어 어가 행렬을 인도하나
겁을 먹은 말들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자꾸 주저앉는지라
채찍으로 암만 때려도 일어나지를 않으니
임금이 하릴없이 어가에서 내려 얼음 위를 걷는데
몇 번이나 미끄러지면서 겨우 강을 건넜구나
날은 벌써 저무는데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내려놓니 산성까지 오를 일이 멀고 아득하다.
임금이 언제 전에 산을 올라 봤겠느냐
평지도 어려울데 산세가 가파르니, 다리는 휘청 숨은 헐떡
신하들이 번갈아서 등에 업고 걸어보나
양반들이 언제 전에 짐을 져 봤겠느냐
평지도 어려울데 제 몸 하나도 어렵구나. 허리는 삐끗 목은 쭈삣
눈 쌓인 산길에서 미끄러지고 엎어지고 넘어지기를 거듭할제
날은 벌써 깜깜해져 불빛 하나 없는데
아차, 그만 산성 대문 오르는 길을 잃어버렸구나
임금과 세자는 물론이요
수행한 백관들과 궁녀들이 모두 기진맥진하여
엄동설한 눈보라 찬바람 속에 비통한 심정이 되어
산속을 방황하고 있을 적에
엇모리
짐 내려온다. 짐 내려온다
어둑한 산비탈에 시커먼 짐이 내려온다.
저 짐이 무슨 짐인고 나무꾼 나무짐이라
저 나무꾼이 누구인고, 저 나무꾼 누구인고
남한산성 서문 밖 사는 대장장이 서흔남이라
쇠를 녹이고 두드려서 농장기도 만들고 병장기도 만들고
목수들 연장도 만들고, 풍물패 풍장도 만들고
기와잇기와 나무장사로 그럭저럭 살아갈제
서흔남 생김 봐라, 허우대가 엄청 크고 힘이 장사인데다
남한산을 오르내리며 잔뼈가 굵은 터라
오늘도 제 키보다 갑절이나 높은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
눈길을 내려오다 한 곳을 당도하니
가파른 산 비탈에 어떠한 사람들이 이상한 옷을 입은채로
눈 위에 지쳐서 주저앉아 있거날
서흔남이 의아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는
“이 춥고 어둔 시간에 웬 사람들이시오?”
아니리 - 한 신하가 그 정황에도 위엄을 갖추어 하는 말이 “상감마마 행차시다. 어서 엎드리거라.” 서흔남이는 상감이 뭔지도 모르는 터라, “상감인지 땡감인지 이런 거추장스런 옷을 입고 산속에서 뭐하고 계신대요?” 신하들이 어이없어 짐짓 화를 내며, “상감께서 국난을 당하시어 산성으로 가시는 중에 귀한 옥체가 추위와 피로에 지쳐 잠시 쉬는 중이시다. 남문으로 입성해야 할 터인데, 남문이 어디 있느냐?” 서흔남 하는 말이 “남문으로 가다가는 또 길을 잃을텐데요, 서문이 예서 가까우니 지가 업어다 드리지요” 서흔남이 임금을 등에 업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니 이경(二更)이 되어서야 겨우 서문에 닿았것다.
인조가 입성한 후 또 한차례 소동이 있었는데, 김류가 남한산성의 지리적 불리함을 내세워 강화도로 옮길 것을 역설하므로 인조는 다음날 산성을 나섰으나, 눈 덮인 산비탈에서 말이 계속 넘어지는 통에 결국 강화행을 포기하고 돌아왔것다. 그러나 이런 것은 정사의 기록이고, 야사에는 서흔남과 관련한 더 재미있는 얘기가 전해오는 바, 광대가 이 흥미진진한 야사를 놔두고 그냥 갈 수 있것느냐? 산성에 오른 다음날 임금은 어젯밤 자기를 업어다준 서흔남을 불러들였것다.
엇중모리
“그대가 아니었으면 짐이 큰 고초 겪었을 터
큰 상을 내릴 터인즉 소원이 있다면 말해 보라.”
서흔남이 뜻밖에 일이라 아무 생각이 안나는데
상감이 입고 있는 화려한 옷이 눈에 띈다
황금으로 수를 놓은 용 두 마리가
꿈틀꿈틀 하는 것이 휘황찬란한지라
“나으리가 입고 계신 그 옷이 갖고 싶소이다.”
지켜보던 신하들이 깜짝 놀라
“저런 무엄한 놈이 있는가, 임금의 옷을 내놓으라니...
신하들이 황망해 할제, 임금이 만류한다.
“괜찮다 놔 두거라. 참으로 순박한 백성이로다.
짐이 입은 이 정복이 그리 입고 싶다 하니
곤룡포 한 벌을 가져다가 이 백성에게 하사하라.”
대장장이 서흔남은 하사받은 곤룡포를
무명으로 겹겹이 싸서 반닫이에 넣어두고
아침마다 절을 하며 평생을 정성껏 섬기다가
다 살고 죽은 다음에는 그 곤룡포와 함께 묻혔더라. 어질 더질.......
판소리 <남한산성> 2
아니리 - 무슨 춘향가 끝나는 대목처럼 되어버렸네. 인조가 아주 어진 임금처럼 되어버리고... 그건 그렇고 줄거리는 다시 정사로 넘어가는데, 어디 나오는 정사냐고? ‘조선왕조 실록’, 나만갑의 ‘병자록’. 홍경모의 ‘중정 남한지’, 정약용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나, 이 판소리 만드느라고 공부 많이 했어. 병자록을 쓴 나만갑은 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식량과 물품관리를 책임진 관량사(양향사)라는 직책을 맡은 관리였는데, 이 판소리에도 등장한다고.
다음날 아침 청나라 대군이 물밀듯이 몰려와 산성을 포위한즉, 바깥과 통하는 길이 모두 막히게 되니 이 날부터 산성에 갇힌 고달픈 하루하루가 시작되었것다. 임금이 행궁에서 긴급 어전회의를 열고 서둘러 지휘 체계를 정비하는데,
단중모리
영의정 김류는 군무를 총괄하는 체찰사를 겸하라
훈련도감 신경진은 이현달을 중군 삼아 동성 망월대를 수비하라
호위대장 구굉은 남성을 수비하고
수원부사 구인후는 이곽을 중군 삼아 구굉을 도우라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을 수비하고
수어사 이시백은 이직을 중군 삼아 서성을 수비하라
여주목사 한필원과 이천부사 조명욱,
양근군수 한회일과 지평현감 박환은 각각 성첩을 나누어 수비하라
파주목사 기종헌은 성첩 수비에 합류하라
도원수와 부원수,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들은
하루 빨리 근왕병을 모아 임금을 보위하라
이렇듯 산성 수비를 강화하고 명나라에 급히 원병을 청하는구나
아니리 - 하지만 군무의 총책임자인 체찰사를 영의정 김류에게 맡긴 것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셈. 김류가 제일먼저 한 일이 최명길을 앞세워 임금에게 청국과 화의하기를 청한 일인데 그것도 세자를 적의 진영에 보내 신하를 일컫고 황제를 일컫기를 청했으니, 이 사실을 안 예조판서 김상헌이 분개하여 “내 그런 건의를 한 자들을 칼로 목을 베고, 맹세코 그자들과 한 하늘에 살지 않겠노라.” 울분을 토했것다. 사흘째 되던 날, 임금이 성을 순찰하던 중에 병조참지 나만갑이 임금을 청대하여 한 방책을 아뢰는데(참치가 아니고 참지, 참의와 같은 직책),
중머리
병조참지 나만갑 아뢰리다.
오랑캐가 화의를 운운하며 변덕이 자심한 것은
필시 시간을 벌어 후군을 기다림이 분명한 바
적병이 멀리 와 쇠약한 틈을 타서
군사를 내어 먼저 치면 이길 수 있을 터이나
적을 보면 지레 겁부터 집어먹으니
만약 서로 싸워 한번 이기기만 하면
군사들의 사기는 배가(倍加)할 것인즉
적의 머리 하나에 은 10냥씩을 상 주고
상을 원치 않는 자는 벼슬을 주어 치하하면
군졸 중에 어찌 용감한 응모자가 없으리까
부디 포상의 방책을 강구하소서.
아니리 - 임금이 체찰사 김류에게 의견을 물은즉 “한번 싸워 패하면 더욱 감당키 어렵소이다.” 반대하고 나섰거날, 임금이 웬일로 체찰사의 의견을 물리치고 “적의 머리 하나에 은 30냥을 상 주리라” 하며 희망자를 모집하게 하니, 지원자들이 앞다투어 모여 들었것다. 북성을 맡은 총융사 이서가 와병 중인지라, 원두표를 어영부사로 삼아 이서 대신 북성의 군사를 통솔하게 하니,
잦은모리
북문대장 원두표가 군사를 데리고 출전하여 적 여섯명을 죽이고
호위대장 구굉도 군사를 모아 남문을 빠져나가 적 스무명을 죽이니
임금이 기뻐하여 그들의 품계를 올려주게 하였구나
어영별장 이기축도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나가 적을 여럿 죽이고
도감대장 신경진도 군사를 내어 성 동쪽에서 적을 여러 명 죽이고,
북문의 어영군도 적을 여럿 죽이고 동쪽의 신경진이 또 서른명을 죽여
전후 죽인 적의 수가 백여명에 이르렀거날
우리 군사는 죽은 자가 겨우 대여섯명에 불과하고
살에 맞아 부상한 사람도 일고여덟명에 지나지 않으니
노적과 마주쳐도 겁날 이유가 전연 없다
훈련도감과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이 모두 출전하여 전과를 올리니
임금이 고무되어 몸소 북문에 나아가 싸움을 독려하고
군사들을 호궤하여 걸진 음식을 베푸니
성 안의 사기가 갑절로 솟는구나
아니리 - 이렇듯 군사들 사기가 올라간 데는 나만갑의 공이 큰 바, 임금은 나만갑을 곧바로 관량사(양향사)로 임명하였것다. 허나 성안의 창고에는 쌀과 잡곡이 겨우 1만 6천섬 밖에 보관되어 있지 않은즉 이는 만여명 군사들의 불과 50일 식량이라. 적병이 성을 포위하고 있으니 식량이 떨어지면 항복하지 않을 수 없을 터, 식량도 걱정이나 당장은 엄동설한에 추위가 더 걱정이라. 열하루째 되던 날 겨울비가 밤새 내려놓니, 군사들이 모두 비에 젖어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는데, 그 정상이 너무나 가혹하여 차마 말로 할 수가 없구나.
진양조
성첩을 지키던 군병들이 밤새 젖고 얼었는데
손가락 마디가 빠져나가 창을 쥐지도 못하고
온 몸을 덜덜 떨며 발을 동동 굴러봐도
솜옷마저 젖고 얼어 움직일 수 조차 없구나
임금이 묻는 말이
“군병들이 얼고 젖었을 터, 어찌해야 하겠느냐?”
예조판서 김상헌이 아뢰는데,
“전하, 종친과 사대부들, 사찰의 승려와 민촌의 백성들에게서
여벌의 옷과 버선을 거두어서 군병들을 갈아입게 하소서.”
이조판서 최명길이 울먹이며 아뢰기를
“전하, 부녀자의 속것으로 군병을 입힌다 해도
강상을 해치는 일이 아니올 터, 서둘러 시행하소서.”
이때여 영의정 김류가 나서더니
“전하, 종친의 의관을 거둠은 왕실의 체통을 허무는 일,
옷을 거둠에 종친은 제외하여 주소서.”
임금이 깊이 한숨 쉬며, “알았다. 물러들 가거라.”
임금이 신하들을 물리고는 버선발로 뜰 아래로 내려가
젖은 땅에 비를 맞으며 한참이나 서있은즉
소현세자가 놀라 달려나와 부복하여 있는 중에,
임금이 망연하여 자탄하며 비는 말이
“고립된 이 성에서 믿는 것은 하늘인데,
싸우기도 전에 얼어죽을 형세이니
내 한몸은 아까울 것이 못되나 만민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늘이 보우하사 우리 군사와 백성들을 살리소서.”
임금도 통곡하고 세자도 통곡하고
바라보던 신하들도 통곡을 하는구나
아니리 - 기실 인조 임금은 집권 과정에서 정통성이 미약한데다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국난을 자초한 측면이 있지만, 이 날은 자기 허물을 반성하는 마음이 하늘에 전달되었던지 밤이 되자 다행히 비가 그쳤것다.
이렇듯 힘겹게 날을 보내는 중에 청장 용골대가 불쑥 어떤 문서를 보내온 바, 읽어본즉 ‘너희가 선비의 나라라더니 어찌 이리 무례하냐? 너희 신료들 중에 물정을 아는 자가 마땅히 나를 맞아야 하지 않느냐? 너희 군신이 그 춥고 궁벽한 토굴로 들어가 한사코 웅크리고 내다보지 않으니 답답하다...” 언뜻 화의를 청하는 내용인지라, 묘당에 앉은 대신들이 화의에 응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할제, 최명길이 아뢰기를 “전하!”
중머리
“적이 신들을 성 밖으로 청함은 화친할 뜻이 있는 것,
신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 말길을 트게 하소서.”
김상헌이 나서더니 단호하게 반대한다.
“화친이라 함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논할 수 있는 것,
지금 적의 대병이 이리 깊이 들어왔으니 화친은 곧 투항이오.”
최명길이 주장을 한다.
“적이 서둘러 성을 취하지 않음은
성을 말려서 뿌리 뽑으려는 뜻,
앉아서 말라죽을 날을 기다리자는 말이오이까?
싸울 자리에서 싸우고 지킬 자리에서 지키고
물러설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이 사리일진대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이겠소이까?”
김상헌이 손바닥으로 마루를 내리치며
“이보시오 이판, 물러설 수 없는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은
화(和)가 아니라 항(降)이요. 아시겠소?”
듣고있던 임금이 서안을 두다리며
“그만! 그만들 하라.”
최명길이 말을 계속한다.
“전하, 상헌을 충렬의 반열에 올리시더라도
이 일은 소신의 뜻을 따라주옵소서.”
김상헌이 다시 고개를 들며
“전하, 명길이 종사(宗社)를 호구(虎口)에 던지려 하니
저 자가 과연 전하의 신하이옵니까?”
참다못한 임금이 주먹으로 서안을 내리치며
“그만, 그만 하라지 않느냐?”
끊이지 않는 논쟁을 차마 듣기 민망한지
행궁 처마끝에서 후두두두둑....
얼어있던 고드름이 떨어져 내리는구나
아니리 - 이렇듯 공론이 분분하던 차에 섣달 스무아흐렛날 술사 몇 명이 성안으로 들어와 하는 말이 “오늘은 화의를 하든 싸우든 다 길한 날입니다.” 체찰사 김류가 이 말을 믿고 갑자기 적과 접전하려 하는지라, 장수들이 어이없어 “아니, 싸우려면 싸우고 화의하려면 화의할 것이지 하루 동안에 어떻게 화의하고 싸우고 한단 말이요? 노래하며 울자는 말이오, 웃으면서 곡하자는 말이오?” 극구 만류 하였거날,
잦은모리
김류가 독단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북문 장대 위에 올라가서 싸움을 지휘한다.
“오늘은 길일이라 싸우면 반드시 이길 터,
대포를 먼저 쏘아 적들을 위협한 뒤 선봉부대가 내려가되
놈들이 쌓아놓은 목책을 불태워 장애물을 제거하라.
포수들에 화약을 주되 한꺼번에 주지말고
전황을 보아가며 조금씩 나누어 지급하라.”
대포를 먼저 산 아래로 펑 펑 쏘아댄즉
청군들이 놀랜척 말과 소를 내버려둔 채 슬금슬금 도망가니
군사들이 산기슭을 타고 전진하여 내려갈제
앗불사 저쪽 편 골짜기에 복병이 숨어있거날
성위에 군사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채 소리를 지르는구나
“평지로 내려가면 말과 소를 빼앗을 수 있고 적을 잡을 수 있다.”
군사들이 수상하여 머뭇머뭇거릴 적에
체찰 비장 유호가 김류에게 아부하여 계책을 아뢰는데
“물러서는 자를 목 베면 감히 뉘라 나아가지 않으리까?”
김류가 유호에게 칼을 주어 내보내니
유호가 쫒아내려가 군사들 뒤에서 마구 칼을 휘둘러대니
군사들 생각에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매한가지라
죽든 살든 고함치며 산 밑으로 뛰어 내려가는데
그 중에 별장 한 사람은 그 정황에도 작별인사를 하는구나
“아이고 나는 5대차 독신이요.
내가 죽으면 우리 가문은 영 문닫혀 버리오.”
산을 내려간 군사들이 체찰사 명을 따라
목책부터 불태우고 청나라 군사를 쫒으랼제
연기 자욱한 중에 아까까지 알짱거리던 청군들이
어디로 숨었는지 종적이 없구나
엇모리
이때여 골짜기에서 함성이 일어나더니
숨어있던 복병들이 갑자기 말을 내달아 짓치며 달려온다.
당황한 군사들이 바삐 총을 쏘며 대항해 보나
기습적으로 당한 터라 화약 지급할 새가 없구나
청군의 정예 기마병들이 질풍같이 달려와
이리 치고 저리 치고 순식간에 우리 군사를 풍지박살 내는데
다급한 우리 군사들 급히 몸을 돌려 도망을 쳐보나
목책이 모두 불탔으니 달려오는 기마병을 어찌 막을소냐
쫒기던 군사들이 산으로 도망칠제, 길이 워낙 가파른지라
뒤쫒아온 청군에게 여지없이 당하는데
그제서야 성 위에서 초관이 기를 휘둘러 퇴각 신호를 보냈으나
그 정황에 어느 군사가 깃발 쳐다볼 겨를이 있겠느냐
3백명 우리 군사가 무참하게 전멸을 당했구나.
아니리 - 이 광경을 지켜본 군사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비장 유호가 또 아뢰기를 “우리 군사가 전멸한 것은 초관이 서둘러 퇴각 깃발을 흔들지 않은 때문이오.” 김류가 ‘옳다꾸나’ 허고 초관의 목을 댕겅 베어버리니 근들 아니 불쌍하랴. 그래놓고 임금에게는 전사한 우리 군사가 40명이라고 거짓 보고를 올렸다더라. 이날의 대패로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묘당의 분위기도 화친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것다.
섣달 그믐날,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가 삼전도에 당도했다는 소문이 나돌더니 청군이 온종일 진을 치는데, 눈 내린 산과 들에 하얀 곳이 남아있지 않을만큼 엄청난 대군이라. 황제 홍타이지가 도착하자마자 산성의 형세를 살피더니, 동문 밖 망월봉쪽에 커다란 양산을 세우고 화포를 설치했것다. 화포를 갖고 있는 청군에게 동장대보다 더 높은 망월봉을 내주었으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하랴? 다음날 청나라 장수 마부대가 누런 종이에 쓴 황서를 내놓으며 조선 사신들로 하여금 받들어 갖고가게 한 바, 그 내용이 이러했던가 보더라.
청국조 1 - 대청국 관온인성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詔諭)하노라.
너희는 그동안 줄곧 명을 아비로 섬기며 우리를 멸시하였다.
이에 짐이 노하여 정묘년에 이를 일깨워주었는데도
어째 너희는 스스로 이런 화를 자초하느냐?
짐의 모든 신하들이 짐을 황제로 칭하고 있음에도
너희만 이를 거부함은 무슨 까닭인가?
이제 짐이 대군을 이끌고 너희 팔도를 강탈할 것인데,
너희 아비라는 명나라가 구해주지 않는다면
이는 네 스스로 백성을 화마에 빠뜨리는 짓 아니냐?
어떻게 할 것이냐? 할말이 있거든 분명히 고하라.
아니리 - 임금이 대신들에게 계책을 물은즉, 무례한 조유(詔諭)에 회답을 해서는 안된다느니 그래도 회답을 해야 한다느니 의견이 또한번 분분하다가 일단 답서를 보내기로 하였는데, 답서의 내용인즉 차마 공개할 수 없을만큼 부끄러운 내용이라. 교리 윤집이 임금께 아뢰기를 “전하, 최명길이 지은 문서에 대해 이를 갈지 않는 자가 없소이다. 그의 목을 베어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키소서.” 임금이 답하기를 “최명길은 환란을 염려하여 시기에 맞추어 주선한 바, 어찌 처벌할 수 있겠는가?”
한편 이런 와중에 완풍부원군 이서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서의 죽음과 관련하여서는 정사와 야사에 각기 다른 내용의 설화가 전해오는 바, 광대가 이 두 설화를 하나로 엮어 판소리로 한번 짜보는데,
세마치
어느 날 임금이 밤이 깊도록 성곽의 군사를 돌아보다가
몹시 피곤하여 행궁에 들어 깜박 잠이 들었는데 웬 노인이 꿈에 나타나
“적이 사다리를 타고 북쪽 성으로 오르는데 어째서 막지 않는가?”
호통을 치니, 인조가 의아하여 “귀인은 뉘시오니까?”
노인이 하는 말이 “나는 이곳에 백제를 세운 성주 온조왕이시다.”
중머리
인조가 깜짝 놀라 급히 깨어 일어나서
꿈에서 들은대로 즉시 북쪽 성 근처를 정탐하게 한즉
과연 귀인이 일러준대로 청나라 군사들이 밤을 타서
널빤지를 지고 몰래 북쪽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거날
임금이 즉시 명령을 내려 끓는 물을 갖다 붓게 하니
성벽을 기어오르던 청나라 군사들이 이를 피하다가
미끄러지고 떨어져서 모두 문드러져 물러갔다더라.
세마치
며칠 후 임금의 꿈에 온조왕이 다시 나타나더니
“나의 묘가 왜란으로 불타 없어진지라
이 곳에 나의 묘를 다시 세우되 나 혼자 있기는 적적하니
그대의 신하 중에 충직한 이를 골라 나에게 보내도록 하라.”
임금이 황공하여 “예 반드시 그렇게 하오리다.”
정중히 아뢰었거날,
중머리
이튿날 아침에 임금은 총융사 이서가
어젯밤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접한지라.
온조왕이 이서를 데리고 간 것이 틀림없는지라
인조는 숭렬전에 온조왕의 사당을 세우고
이서를 온조왕의 배위로 종사하게 하였더라.
아니리 -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이서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이 통곡하는 소리가 궐밖에까지 들렸다’고 하고 ‘병자록’에 보면 ‘이서가 죽기 며칠 전 큰 별이 떨어졌는데 그의 죽음에 모든 사람들이 비통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바, 이서는 남한산성 축성의 최고 책임자요 산성 안에 군량미와 물자를 미리 비축해두어 병자년 호란에 대비한 큰 공이 있는 인물이렷다. 헌데 ‘난리일기’라는 글을 보면 ‘이서의 죽음에 대해 뭇 군사들이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성품이 괴팍하고 아랫사람들에게 가혹해서 인심을 잃었다’는 평가도 있는 바, 광대 생각으로는 아까 매바위 전설에서 축성도감 이회는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숭앙됨에 비해 총융사 이서는 죄없는 부하를 참수시킨 권력자로 등장한 것이 다 이런 맥락이라고 보는데, 청중들 견해는 어떠신지? (고수왈, 탁견이다) 고수 견해를 물은 게 아니고 청중들 견해를 물은거여. 어쨌든 숭렬전은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백제 시조 온조왕과 산성축성 총책임자였던 이서의 혼령을 함께 모셔놓은 사당이렷다.
한편 노적들은 서울과 경기도를 횡행하며 강릉과 태릉 헌릉을 불지르더니, 벌봉에다가 흰바탕의 기에 초항(招降)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세워놓고 다시 조서를 보내온 바, 그 내용인즉 “살고자 하면 무조건 항복을 하든가, 아니면 성 밖으로 나와 한번 싸워보라”는 것이라. 허나 조선군대를 지휘 통솔해야 할 도원수 김자점은 관망만 할 뿐 속수무책이고, 충청감사 정세규만이 목숨을 내어놓고 적과 싸웠으나결국은 패했는데, 각지에서 일어난 구원병들은 남한산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 궤멸되어버리니 고립무원의 절망적인 상황이라. 임금이 하릴없이 청에 보낼 국서를 다시 올리도록 영을 내리는데, 사실상의 항복문이라.
엇중모리
조선 국왕 이종(李倧)은 엎드려 절하며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께 글을 올립니다.
대국의 위엄이 멀리 미쳐서 모든 번방이 귀의하여
크신 명령이 바야흐로 새로운데,
소방은 형제의 나라로서
도리어 흥운의 시초에 죄를 지었습니다.
오늘에 출성 하라신 그 명령은 실로 인복의 뜻이거날
황제의 노여움이 대단하시어
여기 있어도 죽고 성을 나가도 역시 죽을 것이므로
룡기(龍旗)를 멀리 바라보고 자결하고 싶을 뿐이나
황제의 덕이 하늘과 같아 반드시 불쌍히 여겨
용서하실 것이라 믿고 감히 진정을 토로하오이다.
단중모리
이때여 예조판서 김상헌이 비국에 들어와 문서를 보고는
개탄하여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임금 앞에 나가 탄원한다
“전하, 명분이 일단 정해지면
노적은 반드시 우리에게 군신의 의리를 요구할 터
성을 나가는 치욕을 면치 못할 것이니
군신이 전하를 위하는 계책이 잘못 되었소이다.
신은 국서를 찢어 이미 죽을 죄를 범하였으니
먼저 신을 주벌하고 깊이 통촉하옵소서.”
임금이 깊이 탄식하더니만 겨우 입을 열어 말을 한다
“예판의 말이 옳음을 내가 모르지 않으나
위로는 종사를 위하고 아래로는 백관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이리 하는 것. 다만 일찍 죽지 못한 것이 한이로다.”
김상헌이 울먹이며 애타게 아뢴다.
“예로부터 군사가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소이다.
급기야 적국으로 잡혀가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이까?“
눈물을 줄 줄 흘리며 간절하게 말을 하니
임금 곁에 서있던 소현세자도 목놓아 우는구나.
아니리 - 울음을 멈춘 김상헌이 최명길을 돌아보며 “대감,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시오?” 최명길이 씁쓸히 웃으면서 “대감은 찢으시지만 나는 도로 주워야겠소이다.” 찢어진 국서를 주워모아 다시 풀로 붙이거날, 병조판서 이성구가 옆에 있다 김상헌을 책망하는데, “대감이 화의를 배척하여 나랏일을 이 지경에 이르게 했으니 대감이 적에게 가시오.” 김상헌이 정색하며 “나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있소. 나를 적진에 보내준다면 죽을 곳을 얻은 것이니 꼭 그리 해 주시오.”
최명길을 비롯한 사신들이 신하 신(臣)자가 들어간 국서를 갖고 적진으로 들어가 칸의 글을 받아온즉,
청국조 2 -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는 조선국왕에게 조서를 내리노라
너에게 출성을 명하여 짐을 만나보게 하는 것은
네가 성심으로 열복함을 보고자 함이다.
네가 과연 성에서 나와 귀순하고자 한다면
먼저 척화를 주모한 신하들을 결박하여 보내라
짐은 그들을 효수하여 뒷사람을 경계할 것이다.
너희가 이번에도 짐의 말대로 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간곡히 빌어 청한다 해도 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이에 특별히 한번 더 효유한다.
아니리 - 최명길 등이 청의 조서에 답하는 문서를 다시 작성하여 적진에 전하는데, 국서의 내용이 기실은 임금의 출성과 척화신을 잡아보내라는 조유에 대한 완곡한 거절이라. 용골대가 노발대발하는데, “너희 나라가 답한 것은 우리 황제의 글 내용과 틀리기 때문에 받지 않겠다.” 국서를 되돌려 주었것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임금의 출성을 담은 국서를 다시 작성하여 회답하기로 하되, 척화신을 골라낼 방법이 난감한지라. 홍익한을 먼저 우두머리로 지목하였으나 그는 산성에 있지않고, 조정에서는 척화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자수토록 하는 결정을 내렸것다. 기개있는 신하들이 앞다투어 나서는데
중중모리
이조참판 정온이 자수의 글을 올리는데
“임금이 지극한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 당연한 일
신이 비록 불민하야 척화의 우두머리는 아니오만
사신을 목 벨 것을 청하였고 적서를 불 태우라 간했으니
그만하면 신도 실상 척화의 우두머리가 아니겠오이까
신이 죽어서 나라의 존망에 도움이 된다면
어찌 감히 제 몸을 아끼리오.”
예조판서 김상헌은 국서를 찢은 이후
미음 한모금 입에 대지 않아 목숨이 끊어질 지경이다가
척화신을 적에게 보낸다는 말을 듣고는
비로소 일어나 음식을 먹고 하궐로 들어가서
“신 예조판서 김상헌 아뢰오.
신이 바로 척화의 우두머리인즉
전하께서는 묘당에 명하시어
신으로써 적의 요구에 응하도록 의논케 하옵소서.”
전 대사간 윤황이 노구를 이끌고 하궐로 들어와
“신은 일찍이 적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 부당하다고
논한 적이 있는 척화신이니 신을 적국에 보내주시오.”
임금의 처분을 기다릴제 그의 아들이 급히 달려와
“전하, 저의 아비는 너무 연로하신고로
제가 아비를 대신하여 적진에 나가
저의 목숨으로 속(贖) 바치기를 청하오.”
교리 윤집과 전 수찬 오달제가 상소를 하는데
“신들이 이제껏 최명길의 주화론을 극구 배척하였으니
바로 드러나게 화친을 배척한 것이 분명하오나
짐승같은 오랑캐에게 신들은 사죄할 것이 없는 바
명을 받들지 않고 오랑캐와 어찌 수작할 수 있겠소이까
신들이 적진에 가서 한번 칼날을 받음으로써
오랑캐의 간교한 요청을 막도록 하소서.”
서슬 퍼런 기개로구나.
아니리 - 한편 청태종 홍타이지는 겉으로는 큰소리를 쳤지만 실은 뒷걱정이 없지 않았던 바, 명나라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에 병력을 오래 주둔했다가는 후환이 염려되는 바, 속전속결로 조선을 정복해야 할 터인데, 남한산성이 워낙 견고하여 공성이 쉽지 않은데다, 대청국 황제가 직접 조선 땅에 들어온 바에 조선 왕을 생포해서 무릎 꿇리기 전에는 체면이 안 선단 말이여. 강화도를 먼저 공략해서 왕족들을 인질로 잡는 수밖에 없겠다 생각하고, 9왕으로 하여금 몽고군 3만을 거느려 공격케 하니 강화도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구나. 그래놓고는 망월봉에 홍이포를 갖다놓고 연일 행궁을 향해 대포를 쏘아대니, 돌배만한 포탄이 우박처럼 떨어지는데, 급기야 일부 군사들이 칼을 차고 궐 안에 들어와 화의를 반대한 사람들을 내어놓으라며 소동을 벌이는 사건이 일어났것다. 군란의 조짐마저 있는데다 설상가상으로 강화섬이 함락되어 봉림 인평 두 대군과 숙의 세자빈이 청군에 인질로 잡혀 버렸으니 사면초가라. 임금이 마침내 남한산성을 나가기로 결정을 내렸것다. 그리하여 최명길 등이 출성의 소견을 담은 국서를 가지고 또다시 적진으로 간 바, 그 내용이 이러했것다.
창조 - 조선국왕 신 이종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신은 성지를 받들고 폐하의 큰 덕에 감격하여 귀순하려는 마 음이 간절하였으나, 두려운 마음에 갇혀 여러날 회피하고 지체하는 죄만 쌓게 되었으니, 스스로 나아가 폐하의 용안을 우러러 뵙지 못한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까? 신이 바야흐로 3백년 종사와 수천리 생령을 폐하에게 우러러 의탁하게 되었으니, 삼가 폐하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소서.
아니리 - 조선이 청국에 항복한다는 사실을 알자 척화신들 중에는 자결을 시도한 이들이 있었으니, 김상헌은 스스로 목을 매어 거의 죽게 되었다가 살아났고, 정온은 칼로 배를 찔러 자결하려 하였으나 기술이 서툴러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고 하더라.
성안이 뒤숭숭한 가운데, 영의정 김류가 좌의정 우의정과 함께 임금을 뵙고 항복 절차를 논의하는데, 무엇보다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골라 뽑는 일이 난감한지라. 척화에 앞장선 신하가 한두명이 아닐 뿐더러 그 경중을 가리기 어려운즉, 처음에는 11명을 보내기로 임금에게 청했는데, 거기다 윤황 부자를 다 넣어놨다더라. 자신들의 경솔한 판단이 좀 찜찜했던지 삼정승이 재차 논의를 해서 결국 윤집과 오달제 둘만 보내기로 결정을 하였것다.
진양조
윤집과 오달제가 임금을 뵙고 하직인사를 하는데
임금이 처연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대들의 의도가 나라를 그르침이 아닐진대
마침내 이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구나.”
윤집이 아뢰는데 평소와 같이 의연하구나
“험난한 시기를 당하여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만번을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소이다.”
“그대들이 나를 따라 외로운 성에 들어왔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오달제가 아뢰는데 의연함이 다르지 않구나
“신은 이 일을 당하여 자결하지 못한 것이 한이었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소이까”
임금이 목이 메어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두 사람이 목이 메어 통곡하여 아뢰는데
“전하께서 출성하심이 망극하여이다.”
임금이 기가 막혀 “죽을 곳에 가면서도 나라 걱정하는
말을 하는가? 그대들의 부모와 처자는 어디 있는가?”
윤집과 오달제가 처연한 심정으로 부모 처자를 반추하니
임금이 듣고나서
“참혹하고 참혹하다. 그대들의 가솔들은
내 반드시 돌보아줄 터, 부디 살아서 돌아오라.”
내관에게 명하여 술을 대접하게 할 제
승지가 들어와 아뢰기를
“사신이 벌써 문에 나와 재촉하고 있소이다.”
두 신하가 술잔을 놓으며
“시간이 이미 늦었사오니 이제 떠날까 하옵니다.”
두 신하가 흐느껴 울며 임금께 절하고 하직을 고하는구나.
아니리 - 후세 사람들은 홍익한 윤집 오달제 세 분을 일컬어 삼학사라고 하는데, 홍익한은 정축년 2월 평양에서 체포되어 의주 부윤 임경업의 따뜻한 배려를 받은 후 심양으로 압송되었다가 끝내 순절하였고, 윤집과 오달제는 남한산성을 내려가 청 황제를 대면한 앞에서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하여, 결국 심양까지 끌려가서 갖은 고초 끝에 순절하였으니 진정 충절과 기개의 귀감이라. 이 세 분의 위패를 모신 곳이 바로 남한산성 안의 현절사렷다.
한편 좌의정 홍서봉과 이조판서 최명길 등이 적진을 찾아가 임금의 출성 절차를 논의한즉, 마골대가 말하기를 “이 일은 옛날부터 규례가 있는데, 제1절목은 너무 가혹하니 제2절목으로 행하는 것이 좋겠소.” 제1절목이란 손을 뒤로 묶고 구슬을 입에 물어 황제에게 바치는 의식을 말하니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는 차마 못할 짓이라. 마골대가 생색을 내며 은혜를 베푸는 양 하더니, 그날 밤 늦게 청 황제의 조서가 도착한 바, 그 내용을 볼작시면
청국조 3 - 관온인성황제는 조선국왕에게 조유한다
그대가 잘못을 뉘우치고 귀순하고자 한다면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명의 연호(年號)를 버리라
그대의 장자와 차자를 인질로 삼되
그대의 유고시는 인질로서 왕위를 계승케 하리라
명나라를 정벌할 병사의 징발에 착오없게 할 것이며
가도를 공격할 군선 50척을 바로 준비하라
모든 성벽은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넌 후 도망하여 되돌아오면
반드시 체포하여 주인에게 보내라
청에 대한 모든 예의를 명나라의 예와 다름 없도록 하라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살려주었으니
마땅히 은혜를 생각하여 신의를 어기지 말라.
아니리 - 용골대가 하는 말이 “삼전도에 이미 항복을 받는 단(壇)을 쌓아놓았소. 황제가 서울 궁궐에서 나오셨으니 내일은 의식을 거행해야 할 것이오.” “국왕께서 용포를 착용하고 나가야겠지요?” “용포는 착용할 수 없소.” “남문으로 나가야 하겠지요?” “죄를 지은 사람은 정문을 통해 나올 수 없소.” 그날 밤을 새워 임금과 세자가 입고 갈 푸른 옷을 지어 바쳤것다. 그리고는 정월 그믐날, 입성한지 47일째 되는 날, 청의 장수 용골대가 성 밖에 와 빨리 나오기를 재촉하니
중머리
임금이 출성한다. 조선 임금이 출성한다.
푸른 옷차림으로 흰 말에 올라타고 서문을 통해 나가는데
삼정승과 판서 승지 각 5인이 임금을 뒤따르고
왕세자가 그 뒤를 따를 적에
시강원 익위사 관리들이 세자 뒤를 따라간다
성 안에 남은 신하들은 가슴을 치고 통곡하고
백성들은 남녀노소 목 놓아 슬피 우는데,
용골대가 수백 기병 거느리고 앞에서 인도하여
벌판을 가로질러 삼전도로 나아가니
청의 황제가 큰 단을 쌓고 황금빛 천막을 펼치고 앉았는데
갑옷과 투구 차림의 무사들이 활과 칼을 몸에 차고
천막 좌우에 옹립하여 있는데 사냥개들이 도사리고 앉았구나.
임금이 말에서 내려 비틀거리며 단 아래로 걸어가니
앉아있던 악사들이 장중한 연주를 시작한다
임금이 단 아래에서 북쪽을 향해 무릎 꿇고 앉아
황제에게 절을 하는데 한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다시 한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또한번 절하고 다시 세 번 머리를 조아리니 삼배 구고두례라!
용골대가 황제의 말을 받아 임금에게 단에 오르라 명령하니
청의 황제는 남쪽을 향해 앉아있고
임금은 동북쪽 모퉁이에서 서쪽을 향해 앉았는데,
동서 양 옆으로 청나라 왕자들이 차례로 앉아있고
왕세자와 봉림 인평 두 대군이 그 아래 잇달아 앉았구나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가 엄숙히 고하는데
“이제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술잔을 세차례 돌린 후에 황제가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고,
기다리던 사냥개들에게 남은 고기를 던져주는구나.
아니리 - 굴욕적인 항복 인사를 끝낸 임금이 단을 내려와 밭 가운데 앉아 명령을 기다리니, 왕세자 소현과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은 인질로 데려가기 위해 청 진영에 머물게 하고, 임금과 인평대군은 도성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하였것다. 해질 무렵 임금 일행이 소파진(所波津)에서 배를 타고 건너랴 할 제 나루에는 빈 배 두척만 달랑 남았는데 백관들이 서로 먼저 타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면서까지 소동을 벌였다더라. 임금이 황망히 도성으로 들어갈제 길가에는 죽은 백성들 시체가 널려있어 참혹하기 그지없거날, 청군에 잡혀 포로로 끌려가던 백성들이 굶주리고 지친 모습으로 길비닥에 앉아있다 임금이 지나는 것을 보고 울부짖어 외치는데,
진양조
“임금이시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이 불쌍한 백성들을 버려두고
이 가련한 백성들을 이대로 버려두고
임금이시여, 어디로 가십니까?”
만여명도 넘는 남녀 백성들이
울부짖는 아우성 소리에
산천도 흐느끼고 초목도 우는구나.
아니리 - 다음날 선전관이 산성으로 가서 군대를 해체하고 모두 성에서 내려오게 한즉, 47일간에 걸친 남한산성에서의 대청 항쟁은 이로써 끝이 났것다. 인조 이후 조선의 여러 왕들이 남한산성을 들렀는데, 숙종이 이 곳 행궁에 머물며 슬픈 감회를 가누지 못한 적이 있고, 영조도 행궁에 와 아버님 드셨던 방에서 쉬며 간절한 느낌을 소회한 바 있고, 정조도 이곳 남한산성에 행행해서 병자년 옛일을 생각하시고 ‘지화문’ 현판을 걸었다는 기록이 남아오것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19세기 말, 일제의 침략으로 조선 각지에서 의병들이 불같이 일어날제
잦은모리
일천팔백 구십육년 광주 이천 양근의 백성들이 봉기하여
일제에 저항할제, 남한산성을 점거하여 거점으로 삼은 바
그 수가 일천육백명에 달한지라, 이름하여 경기도 연합 의병부대라
경기도 의병들은 삼남지방의 의병과 합세, 서울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축출하고 고종 임금을 환궁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군의 선공을 받아 맹렬히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구나.
남한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한 일본이
산성을 완전 점거하고 무기를 수거하는데
화약으로 현지 폭파를 단행하며 완전 초토화를 획책하니
사찰들이 모조리 불에 타 소실되고 행궁도 완전히 파괴되었구나
그러나 남한산성은 일제 강점기 하에 3.1운동을 비롯하여
해방독립투쟁을 활발히 전개한 거점이요
항일민족운동의 터전으로 남아온다.
아니리 - 남한산성은 일제 강점기 민족말살정책에 의하여 병자호란 당시 굴욕적인 항복을 한 치욕의 장소로 왜곡되면서 소중한 문화재들이 방치되고 마땅히 본받아야 할 선인들의 애국정신까지도 굴절되고 외면당하는 결과가 되었것다. 허나 냉철하게 살펴보면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은 청의 군대에 함락된 바 없고 오히려 남한산성이 있었기에 압도적으로 우세한 청군의 공격에 47일간이나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 광대 생각으로는 만일 누가 남한산성을 치욕의 현장이라고 말한다면 오랑캐에 점령되어 갖은 약탈과 파괴를 당한 서울 도성이 더 치욕의 현장일 것이요, 또 적의 공격에 속수무책 무너져 방화와 살육을 당한 강화도야말로 더욱 치욕의 현장이 될 것인즉, 청중들 생각은 어떠하신지? (고수에게) 그럼 고수 생각은 어떠하셔? 결론적으로 말해서 남한산성은 굴욕적인 항복을 한 치욕의 현장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고 최후까지 항쟁한 민족의 성지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렷다.(박수!)
이렇듯 남한산성은 천년을 넘게 우리 민족을 지켜오며 단 한번도 함락당한 적이 없는 국난 극복의 성지이자 선인들의 삶과 정신이 깃든 갖가지 유적들을 간직한 문화유산의 보고라. 여기 남한산성에 보존된 문화재들을 한번 돌아보는데
중중모리
남한산성 유적으로는 남한 행궁이 첫 번째라
임금이 지방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는 행재소로
상궐은 내행전이요 하궐은 외행전이며
좌전엔 종묘를 봉안하고 우실엔 사직을 봉안한다.
외삼문 지나 행궁 입구에는 한남루가 세워있고
행전의 동쪽엔 인화관이 있어 망하례를 행하는데
조정의 귀한 손님들이 유숙하는 객관이라
상궐 담장 바깥에는 좌승당이 자리하니
편안한 중에도 위급함을 잊지 않으면
앉아서도 이길 수 있다는 뜻이로다
수어장대를 올라가보자
남한산 주봉은 청량산인데 청량산 정상에 자리잡은 바
군사의 지휘와 관측을 위한 장대 중의 으뜸이라
2층 누각 안쪽에 편액이 걸렸는데
병자호란의 시련과 효종의 비통함을
결코 잊지 말자는 뜻에서 ‘무망루(無忘樓)’라 하였구나
청량당은 어디메뇨 수어장대 바로 옆이라
산성 축성의 실제 책임자인 벽암 각성대사와
모함을 받고 참수당한 횡수대감 이회를 모셨는데
이회 장군의 베어진 목에서 날아오른 매와
송씨부인 유씨부인 두 부인을 함께 모셨구나
숭렬전은 어디메뇨 숭렬전으로 가보는데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산성축성 총책임자인
이서의 영혼을 하께 모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라
정문의 솟을삼문이 신비감을 더해주는구나
현절사로 가보자 현절사를 참배하자
병자호란 당시 척화에 앞장서 심양에 끌려가서
끝내 충절을 지키다가 비운에 순절한
홍익한과 윤집 오달제의 삼학사와
항복을 끝까지 반대하여 자결까지 시도했던
김상헌과 정온의 위패가 배향된 우국충절의 성소로구나
침괘정으로 가보자 침괘정이 무슨 뜻인고
창을 베고 누워서 편히 자지 못한다 함은
나라의 일을 걱정하여 잠을 못 이룬단 말
절치부심 유비무환의 뜻이라
연무관은 어디멘고 연무관으로 달려가보자
군사들이 훈련하는 연병관이 예로구나
높은 기단 위에 자리잡아 규모가 크고 육중하니
군사들의 용맹과 무관들의 기개가 묻어나는구나
엇모리
남한산성 8도 사찰 아홉 사찰을 둘러보자
개원사는 전국에서 모인 승도들을 총지휘한
조선 승병 총지휘소 본영사찰이로구나
무게가 200여근 되는 큰 놋쇠동이들 남아있네
망월사는 산성 안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로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을 쌓을 적에
한양에 있던 절을 옮겨 창건하게 된 절이로다
장경사는 동문 북쪽 산 중턱에 자리잡아
승병들의 훈련장이 주로 이 곳이었는데
그나마도 옛모습이 남아있는 절이란다
국청사 터를 가보자 서문 바로 아래란다
금나라가 청나라로 바뀔 것을 예견하여
국청사로 이름지었다는데 진위야 누가 알리요
국청사 우물이 피부병에 좋다하니 한번 가서 씻어보자
한흥사 터로 가보자
동쪽 기슭에 자리잡아 땅은 넓고 탁 트였는데
사찰의 모습은 간 곳 없고 주춧돌만 남았구나
옥정사 터는 어디메뇨
북문 안쪽 남쪽 기슭에 성곽을 짓기 이전부터
옥같은 샘 솟아나는 그곳에 절이 있었다는데
커다란 맷돌 한짝만이 댕그라니 놓였구나
동림사 터로 올라가보자
남한산성 가장 높은 곳인 봉암 아래 있어
산성 안을 훤히 들여다보는 위치인데
돌축대만 남아있어 옛 절터임을 말해주는구나
남단사 터로 가보자 성곽의 남쪽에 위치하여
좌사(左社) 우직(右稷) 양 단(壇)이 있어 남단사라 하였다는데
풍사(風師)·우사(雨師)에 제를 올리는 환단을 일컬음이라
천주사 터는 어디메뇨 서장대 아래로 찾아가보니
누(樓) 앞에 연못이 있었다는데 연못은 간 곳이 없고
주춧돌과 돌절구만 흔적으로 남아있네
아니리 - 이처럼 남한산성 내 사찰들은 산성 축성과 수성의 대임을 맡아 호국사찰로서 그 임무와 역할을 다 하였으니, 이 곳이야말로 호국승군들의 의지가 서려있는 역사의 땅이렷다. 이렇듯 남한산성 문화유산들 둘러보는 것으로 판소리 남한산성 이야기는 끝이 났는데,
엇중모리
오래된 문화유산과 유서깊은 역사가 있는 국가는
흥망의 깊은 수렁에 빠지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부활할 수 있는 힘을 갖는 법.
남한산성은 나라를 지킨 국난 극복의 성지이자
선인들의 삶과 정신이 깃든 문화유산의 보고이자
울창한 숲에 온갖 다양한 동식물들이 살고 있는
자연생태계의 보고라.
어화 세상 사람들아
남한산성에 대한 역사인식과 자긍심을 갖고 .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과 수려한 자연생태계를
잘 보존시키고 널리 인식시켜
남한산성을 세계적인 역사 문화유산의 명소로 만드는데
다 같이 앞장서세.
그 뒤야 뉘랴 알리, 어질 더질
신라의 김유신은 당나라 기병부대 매소성에서 대파하고
기벌포에서 설인귀부대를 섬멸하여 나당전쟁을 끝냈더라.
고려 때 강감찬은 거란의 10만 군사 귀주에서 대첩하고,
승려 김윤후는 몽골장수 살리타이(撒禮塔)를 사살하고
충주성을 방어하니 그 용맹이 놀랍구나.
임진왜란 발발하자 이순신 장군 통영 앞 바다에서
학익진의 진법으로 왜선을 격퇴하니 한산도 대첩이요
물살 강한 울돌목에 왜선을 수장시킨 명량대첩 있거니와
퇴각하는 왜놈 군선 모조리 침몰시킨 노량대첩 대단하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불과 2천 군사로 2만 왜군 격퇴하고
장렬히 전사하니 진주대첩 장할시고
전라감사 권율장군 도성을 수복코자 행주산성 진을 치고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 왜병을 물리치니 행주대첩 이 아니냐
어화 세상 사람들아 이 내 한말 들어보소
천시불여지리(天時不如地利)요 지리불여인화(地利不如人和)라
천시를 얻어도 땅의 일이 불리하면 모두가 무용(無用)이요
지리를 얻은들 사람이 불화하면 모두가 다 허사려니
제아무리 영웅인들 민심이 이반하면 그 어떤 전쟁을 당하리오
전쟁하여 이김보다 전쟁하지 않고 이김이 참된 승리 아닐런가
둘로 나뉜 우리 민족 인화 먼저 이뤄내고
할 일을 하여가면서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