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넘어 세계와 소통한 세계인 장보고의 삶
창작 판소리 [세계인 장보고]는 임진택 명창이 장보고를 최초의 '세계인'으로 규정하여 직접 사설을 쓰고 작창한 작품이다. 신라의 해상 영웅 장보고를 중심으로, 그의 삶이 가진 세계사적 의의를 현대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과거와 현대를 잇는 가치를 전한다.
판소리의 장단 속에서, 장보고는 바다를 통해 동아시아의 경제와 문화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한 지도자로, 동시에 자신의 이상을 향해 고난을 헤쳐나간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전통 판소리의 서사적 힘과 현대적 해석이 결합된 이 작품은, 장보고가 꿈꿨던 세계적 비전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재조명하며, 그의 유산을 새로운 세대에게 전하고자 한다.
만당(晩唐) 시인 두목(杜牧)은
장보고를 仁義之心과 더불어 명견을 가진 인물로 격찬했고,
일본 승려 엔닌(圓仁)은 장보고를
안전한 항해와 재물을 가져다준 신라명신으로 받들었고,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보면 궁복이를
을지문덕의 지략에 비견하야 그 의용(義勇)을 높이 평가한 바,
우리나라 역사인물 중에
동양삼국 정사(正史)에 두루 기록된 인물은 장보고 뿐일러니,
장보고야말로 우리나라 최초의
軍·産 복합 종합상사 설계자요,
바다를 경영한 최초의 세계인이자 자유무역 선구자라.
어화 사람들아.
장보고를 알면 세계가 열리나니,
이제부터 내가 장보고의 활약을 판소리로 한번 엮어볼 것인즉,
이 작품에는 최수종도 안 나오고, 송일국도 안 나오고,
수애 · 채시라도 안 나오지마는,
텔레비전 드라마 ‘해신’보다 결코 자미가 덜하지 않을 터...
딴 생각들 하지 말고, 먼저 나갈 생각도 하지 말고,
좋다, 잘한다, 아먼, 그렇지.” 추임새들 넣어가며,
거드렁 거리고 놀아보세.
1부. 풍운아(風雲兒) 장보고
아니리 - 이 때는 어느 땐고. 신라가 당나라 힘을 빌어 백제 고구려를 멸한 후 마저 싸워서 당나라를 몰아낸즉 이 시기를 ‘통일신라’라고 하나, 기실(其實)은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따로 세웠으니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라 해야 옳으렷다.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 신라 하대 9세기초 무렵, 남해 서쪽 끝 완도라는 섬에 한 젊은이가 사는디, 성(姓)은 없고 이름이 궁복(弓福)이라. 궁복이 이름이 어디서 나온 것이냐 하면, 활 쏘는 솜씨가 귀신이여, 별명이 활보라. 한자(漢字)로 적을라니 활궁(弓)자를 써서 궁복이가 되었것다. 청년 궁복이 생김이 훤칠하고 무예(武藝)에 아주 능한디, 옆에 한 소년이 늘 따라다니거날, 성이 정(鄭)哥고 이름이 년(年)이라. 나이는 아래지만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여. 궁복이하고 정년이가 완도 인근 섬과 바다를 놀이터 삼아 서로 겨루며 맘껏 수련을 하는디,
중중모리
바닷가에서 태어난지라 헤엄 솜씨가 대단하다.
빨리 가기를 겨룰 때는 개헤엄이 제격이요,
멀리 가기를 겨룰 때는 개구리 헤엄이 제격이고,
물살을 헤치며 나갈 때는 돌고래 헤엄이 제격이라.
손발을 놀려 물에 떠 있는 자맥질 오래 가기 겨루는디
한나절이 다 가도록 승부가 나지를 않았으며,
두 사람은 물 속으로 30리를 가더라도
숨이 전혀 막히지 않는 비법이 있었더라.
헤엄은 이만 치고 배를 한번 타 보자.
완도에는 소나무가 매우 울창한지라,
고금도 신지도 약산도는 통나무를 띄워 건너가고,
금일도 금당도 생일도는 뗏목을 엮어서 건너가고,
노화도 보길도 소안도와 좀더 멀리 떨어진 청산도는
돛을 달아서 건너갈제
물살의 흐름과 바람의 방향을 속속들이 아는구나.
장좌마을 건너편에 조음도라는 섬이 있는디,
썰물 때는 물이 빠져 걸어서 건너가고 건너올 수 있는지라,
궁복이와 정년이가 말을 끌고 들어가서 다음 썰물 될 때까지
왼종일 무예 훈련을 했다더라.
잦은모리
무예 중에 가장 기본은 칼쓰기라.
한 손으로 드는 칼, 두 손으로 쥐는 칼
위로 치켜 내려쳤다 옆으로 베고 자르고
온몸으로 부딪쳤다 공중으로 박차 오르니
변화무쌍(變化無雙) 검술이로구나.
그 다음에 필요한 기본은 창쓰기라.
봉(棒)처럼 잡아들고 전후좌우로 휘두르기
냅다 들고 내달아서 곧장 바로 내찌르기
창을 던져 목표물을 직통으로 꿰뚫으니
천하무적(天下無敵) 창술이로구나.
그 다음에 수련 과목은 활쏘기라.
활시위를 바싹 당겨 한껏 멀리 날리는디
내달리는 산짐승도 대번에 거꾸러뜨리고
날아가는 새들까지 여지없이 떨어뜨리니
백발백중(百發百中) 궁술이로구나.
무엇보다 중요한 과목이 말타기라.
말을 타고 달려가며 장창 내어 찌르기
말 위에서 춤을 추듯 쌍검(雙劍) 휘두르기
말 옆으로 몸을 숨겨 홀연 종적(蹤迹) 감추기
신출귀몰(神出鬼沒) 마상(馬上) 재주로구나.
아니리 - 궁복이와 정년이가 이렇듯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가 뛰어난 이유가 완도·청해에서 난 전복·광어 미역·김·다시마 같은 천혜의 수산물을 먹고 자란 덕이라 보는디, 청중들 의견은 어떠허신지... 고수님 고견은 어떠허신지...
궁복이와 정년이가 무관으로 출세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거날, 당시 신라는 ‘골품제’라고 해서 철저한 계급사회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골품제 고것이 아주 골 때리는 제도라, 백성들 희망이 없어. 젊은이들 장래가 없어. 한번 흙수저면 평생 흙수저여, 대대로 흙수저랑께. 요새 젊은이들이 얼마전까지 ‘헬조선 헬조선’ 했다는디, 그 당시가 ‘헬신라’여 ‘헬신라’!
대체 그 골품제란 것이 얼마나 골병이 들었길래 신라가 ‘헬신라’가 됐는지 광대가 소리로 한번 엮어보는디,
세마치진양
골품제라 하는 것은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신분을 차별한 제도라.
왕족을 대상으로는 골제(骨制)를 부여하고
여타 귀족과 평민한테는 두품제(頭品制)를 규정하니,
골(骨)자는 뼈다귀 골(骨)자요 두(頭)짜는 대가리 두(頭)자라.
뼈다귀 제도와 대가리 제도를 합친 것이
골품제가 아니더냐.
잦은모리
성골(聖骨)이라 하는 것은 성스러운 뼈다귀요
진골(眞骨)이라 하는 것은 진짜 뼈다귀 뜻인디,
부모가 다 왕족이면 성골로 인정하고
한쪽 부모만 왕족이면 진골로 규정하니,
진골이 가진 가장 큰 특권은 왕 될 자격이 있는 것.
중앙 정부의 최고 직책은 모두 진골 차지이고
막대한 토지와 가옥에 노비까지 소유하고,
심지어는 말 목장에다 사병(私兵)까지 거느리는
엄청난 특권을 가졌더라.
두품제를 볼작시면
6두품에서 4두품까지는 관직 진출이 가능하나
3두품 이하 평민과 노비는 관직 진출이 불가하고,
두품에 따라 입는 공복(公服)을 색깔로 구분을 하는디
진골은 자색(紫色)이요, 6두품은 비색(緋色-붉은색)이며,
5두품은 청색(靑色)이요, 4두품은 황색(黃色)이라.
관(冠) 재질(材質)도 달리 하고, 요대(腰帶) 무늬도 달리 하고
신발 모양도 달리 하니, 한눈에 신분 등급이 다 드러난다.
골품 등급에 따라서,
가옥 크기도 달리 하고, 안방 넓이도 달리 하고, 객방 숫자도 제한하고
기와의 사용도 규제하고, 땔감 종류도 차별하고...
골품 등급에 따라서,
마굿간 크기도 달리 하고, 말의 품질도 달리 하고
수레 크기도 달리 하고, 수레의 속도도 제한하고...
골품 등급에 따라서,
이불 두께도 달리 하고, 베개 높이도 달리 하고
밥그릇 재질도 달리 하고, 국그릇 크기도 달리 하고
찬그릇 숫자도 달리 하고, 주전자 생김도 달리 하고
숟가락과 젓가락의 굵기와 길이도 달리 하고...
뒷간 크기도 달리 하고, 뒷간 횟수도 제한하고
요강 모양도 차등을 두고, 앉는 자세도 달리 하고...
이렇듯 먹고 싸고 자고 입는 생활 전반에 걸쳐
차별과 규제를 해놓니,
궁복이같은 젊은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출세는커녕 신분상승 꿈도 꿀 수 없는 지옥같은 세상이라.
헬(Hell)신라가 아니더냐.
아니리 – 이 골때리는 골품제가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여전히 남아있거날, 요새 결혼 중매업자들이 유명대학 출신 고시 합격자를 1등 신랑깜으로 하고, 재벌가 딸에다 장차관 · 국회의원 · 고급공무원 · 자치단체장 · 초대형 병원장 딸에다 미모의 연예인 아나운서를 1등 신부깜으로 물색해서 지들끼리 성골입네 진골입네 중매 붙인대잖여? 현대판 골품제렷다. 뭐라고? 나같은 사람은 어디 속하냐고? 나야 물론 반골(反骨 · 叛骨)이지. 각설(却說)하고,
청년 궁복이가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자 헬신라를 떠나 기회의 땅 당나라로 갔는디, 놀라운 일은 당나라 동쪽 황해 연안과 대운하 요로(要路) 곳곳에 진즉에 신라인들 집단촌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인디, 이를 신라방(新羅坊) 신라촌이라 칭하는 바, 이 신라방 내력을 한번 살펴볼작시면,
평중모리
우리 민족이 중국으로 이주를 시작한 것은 7세기 부터라.
삼국시대 백제인으로 원래부터 연안(沿岸)에 살던 이들이 있고,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후 전쟁 포로(捕虜)로 잡혀온 자,
신라에 계속된 기근과 흉년에 먹을 것을 찾아 건너온 사람들,
해적들에 붙잡혀서 노예로 팔려온 양민들에
학문을 익히러온 유학생과 불법을 배우러 온 구법승에
왕위쟁탈 반란을 꾀하다 망명해온 사람까지
시기와 경우를 달리 하며 도래한 신라인들이
지리적으로 가깝고 생업이 가능한
중국 동해안과 대운하 일대에 끼리끼리 모여 살아간즉,
도회지에는 신라방이 조성되고 농촌마을에는 신라촌이 생겨나니,
우리 민족 최초의 해외 한인촌 디아스포라
코리아타운(Korea town)이 이 아니냐.
중중모리
산동반도 해안 일대와 회수 유역의 초주 연수현
장강 하류의 양주 등지에 신라인들이 모여 살며
신라 사람 총관을 두고 자치지구를 운영커날,
신라 말을 사용하고 신라 풍습을 유지하니 결속력이 대단하다.
주민 구성을 볼작시면
배를 만드는 목수가 있고, 수리하는 목공이 있고
배를 운항하는 선원들과 항해 기술자가 따로 있고,
소금을 만드는 염전업자, 숯을 굽는 목탄업자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에 물건을 만드는 공인(工人)들에,
장사하는 상인들에, 짐 나르는 운송업자에
무역업자에 해운업자에, 무역상단(商團) 호위무사에
통역일 하는 통사(通事)까지 각기 생업이 다양쿠나.
궁복이와 정년이가 일자리 찾아 헤맬 적에
무예가 워낙 출중한지라 쓸모가 없을소냐?
양주를 거점으로 해상무역을 주도하던 백제계 신라인
‘설씨(薛氏) 상단’ 호위무사로 들어가서 당나라 생활을 시작한다.
아니리 – 궁복이와 정년이가 상단 호위무사로 지내면서 상인들 교역하는 모습을 지켜볼제, 그 범위가 수도 장안(長安)은 물론이요, 신라와도 무역하고, 멀리 파사국(페르시아)과 대식국(아라비아)과도 닿는 것을 목격했지.
이 무렵 당나라 정세를 볼작시면, 중앙통치력이 약화되고 지방 번진(藩鎭) 세력이 발호할제, 주목할 세력이 산동반도를 거점으로한 ‘평로치청’ 번진이라. 평로치청을 세운 사람이 이정기라는 고구려 유민인디, 그 아들 이사도가 권력을 이어받았것다. 당나라 황제 헌종이 이 평로치청을 제압코자 정예 부대를 창설한즉 이름하여 무녕군(武寧軍)이라. 각지의 무사들을 징모하니 궁복이와 정년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무관 출세 절호의 기회라. 무녕군으로 입대를 했것다.
중중모리
궁복이와 정년이 맹활약을 보아라.
무녕군의 병사가 되야 선봉(先鋒)에 서 싸우는디,
변화무쌍 검술에다 천하무적 창술이며
백발백중 궁술에다 신출귀몰 마상 재주라.
뛰어난 무술 솜씨와 사나운 날램으로
대나무를 쪼개듯이 적들을 물리치니
파죽지세(破竹之勢) 예로구나.
연전연승 소식에 소문이 자자커날,
둘이 함께 군중소장(軍中小將)으로 진급을 해놓니
이때부터 궁복이가 성명을 새로 얻는디
활궁(弓)자 들어있는 베풀 장(張)자로 성을 쓰고
복복(福)자 자기 이름 발음을 차용해서
지킬 보(保)자에 물갓 고(皐)자 가져오니
장보고(張保皐)가 되었더라
잦은모리
군중소장 장보고가 병사들을 이끄는디
장수의 면모답게 병법(兵法)이 능란(能爛)하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패(百戰不敗)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지지 않는 것.
나의 병력이 적보다 많으면 포위해서 굴복시키고,
서로의 병력이 비등하면 적을 분산시켜 공격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선(機先) 제압이라.
빠른 물살이 돌덩이도 거세게 휩쓸듯
사나운 새가 먹잇감을 잽싸게 낚아채듯
기선을 제압하라 --- ---
손무제가 말했듯이 전쟁은 속임수라.
있어도 없는 척, 없어도 있는 척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도록 철저히 위장하라.
군대의 형세는 흐르는 물처럼 변화해야 하는 것.
달릴 때는 바람처럼, 멈춰 설 때는 숲처럼
쳐들어갈 때는 불처럼, 기다릴 때는 산처럼
변화무쌍한 용병술로 필승지세(必勝之勢) 로구나.
아니리 - 이처럼 무녕군 군중소장으로 평로치청을 제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장보고! 앞서 단가 ‘해양역사가’에서 언급했듯, 이 소문을 들은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장보고를 뛰어난 인물로 극찬하여 기록하매 그 존재가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이렷다.
이렇듯 명성을 크게 얻어 무장으로서 앞길이 활짝 열렸거날, 정작 장보고의 심사(心思)가 편치를 않았지. 하나는 용맹을 자랑하며 목숨 걸고 싸운 것이 결국 남의 나라 용병으로 동족끼리 싸운 꼴이고, 또하나는 전쟁이란 것이 권력자들 야욕에 백성들 생활은 피폐(疲弊)해지고 수많은 병사들만 애꿎게 죽어나가는 헛된 짓이라, 더 이상 당나라군 용병 노릇할 생각이 없었지. 장보고가 새로운 인생 설계를 하기 위해 돛단배 하나 잡아 타고 산동반도 등주 연태에서부터 천하(天下) 주유(周遊)에 나서는디,
중중모리
물결 박차고 바람 머금고 해중에 둥-실 떠
배를 띄워 놓니 순풍에 돛단배라
발해만 섬들을 좌로 보며 동진을 계속하여 연안을 돌아드니
붉은 바위가 둘러있는 적산포구가 나타난다.
장보고 거동을 봐라. 적산포 지세를 유심히 본 후
유산포(乳山浦) 거쳐 청도(靑島)를 지나
연운항(連雲港)에 당도하여 숙성촌(宿城村)에 들어가니
신라방과 신라촌이 곳곳에 산재(散在)했다.
장보고와 정년의 용맹이 널리 소문난지라
백제 출신 고구려 출신, 신라 출신을 불문하고
가는 곳마다 유민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들어가니 대운하와 만나거날
북으로 가면 북경이요 남으로 가면 양주 · 항주인디
동남 방향 회수(淮水) 하류, 연수향(漣水鄕)을 둘러 보고
초주(楚州)를 지나 남으로 내려가니
너른 평야 끝이 없더니 대하 장강이 나타난다.
양자강이 예로구나.
여기가 어디메냐, 온갖 선박이 오고가고
화려한 불빛이 난무하는 국제 무역도시 양주(楊州)라.
장보고가 한때 설씨(薛氏) 상단 호위무사로 지낸 곳이라
당나라 상인과 외국의 상인들 심지어는 홍등가(紅燈街)
청루(靑樓)의 기녀들에까지 소문이 자자하다.
진회하에 배를 띄워 불야성을 즐긴 후에
양주를 떠나 소주(蘇州)를 거쳐, 바다에 닿은즉슨
동남아 상인 아랍 상인들 제 집처럼 드나드는
명주(明州)항이 나타난다. 요즘 말로 영파(寧波)렷다.
명주 시내 흘러드는 강줄기가 세 개라
삼강구(三江口)라 불리울데
여요강 따라 올라가보니 월주(越州)가 나오는디
품질 좋은 도기 · 자기가 엄청나게 깔렸구나
이름하여 해무리굽 월주요(越州窯)라.
뱃머리 돌려 북쪽으로 되돌아 올라올제
주산군도 보타도 인근에 암초를 조심해라.
예까지도 신라인들이 자리를 잡았더라.
이렇듯 신라 사람들 서로 돕고 사는 모습과
국제 무역의 실제 현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당나라 동부 해안 따라 밤낮으로 항해해서
달포만에 가까스로 산동반도 적산포에 당도하는구나.
아니리 – 판소리로 그려본 중국 동부연안 지도(地圖)이자, 신라방 신라인촌들을 탐방하여 재당 신라인들을 규합하기 위한 ‘범선 노정기(帆船 路程記)’였던가 보더라. ‘제비 노정기’ 아닌 ‘범선 노정기’였더라.
2부. 해상왕(海上王) 장보고
아니리 - 앞서 완도에서 태어나 무예에 능했던 궁복이가 헬신라를 떠나 당나라에서 상업에 눈 뜨고 무녕군에 들어가 활약하면서 장보고라는 이름을 얻었으나 전쟁에 대한 혐오를 느끼고 평화 번영의 세상, 유민 모두 힘을 합쳐 잘 사는 길을 모색하고자 천하주유(天下周遊)하며 신라방 신라인촌을 탐방하는 대목까지 들어봤것다.
신라방이라고 하지마는 실은 원래 백제 사람들이 자리잡은 곳이라. 이렇듯 천하 주유를 마친 장보고가 상황 판단을 종합해 보는디,
평중모리 - 장보고가 생각한다. 재당 신라인들을 만나보니 선박 제조 기술과 항해술이 뛰어나 이들이 단합하면 대단한 힘이 될 수 있고.
무역을 통해 물자를 교환하면 엄청난 부(富)를 축적할 수 있거날
외국의 선단은 장강 남쪽까지만 오가는 바
신라 일본과의 교역은 황해를 잘 아는 선단이 독점할 수 있으되,
노철산 항로는 안전은 하나 너무 멀고,
발해로 인해 통행이 막혔으니
황해 횡단 항로를 개척해야 할 터.
이를 실현키 위해서는 거점이 필요한즉
산동반도 동쪽 끄트머리 적산촌이 적합하다.
원대한 구상을 설계하여 착착 추진을 해나간다.
잦은모리
가장 먼저 준비할 것은 배 만드는 일이라.
배의 속도를 높이려면 돛을 여럿 달아야 하고
파도를 헤치고 나가자면 밑바닥을 뾰족하게,
유식한 용어로 첨저선(尖底船)이 제 격이라.
항해에는 안전이 첫째라.
선실 내벽을 분리해서 침몰을 미연에 방지하고
선체 측면에 나무판을 겹대어 덧붙이니
충격에도 끄떡 없는 장보고 선박의 특징이라.
이와 함께 본격적으로 무역 활동을 벌이난디
교역의 기초는 무엇보다 물자의 확보라.
당나라 각지에서 숯과 소금을 비롯하야
각종 차와 비단 칠기에 도자기를 확보하고,
신라에서는 금과 은에 인삼같은 약재에다
황칠같은 특산물에다 키 작은 조랑말에 해표 가죽을 구해놓고,
남방에서는 보석 향료, 상아 우각에 유리잔,
희귀한 산물들을 확보하야,
생필품은 생필품대로 사치품은 사치품대로
수요와 공급을 예측해서 구매와 운송 계획을 짜는디,
흔할 때는 보관하고 귀할 때는 방출하야
계절에 맞추어 판매하고 시절에 맞추어 공급하니
이윤이 엄청 많이 난다.
장사의 기본은 신용이라.
장보고 상단 품목들이 사방으로 소문이 나니
보기도 전에 계약하고 나기도 전에 선급(先給)이라.
장보고 상단 신용등급이 무디스 국가신용등급 저리가라 할 정도로
최고 등급에 올랐다더라.
아니리 – 요새로 치면 조선업에 해운업 무역업을 총괄하는 종합상사를 차렸다 이 말인디, 이 종합상사 거점이 산동반도 적산포였다 이 말이여. 서쪽으로는 장안‧북경으로 통하고, 동쪽으로는 황해 횡단 뱃길로 신라가 제일로 가깝거든.
헌디 장보고가 여기서 그칠 사람이 아니여. 적산포는 1차 거점이고, 2차로 더 나아가 일본 규슈 하까다(博多)항을 방문하고 신라·당나라·일본 3국의 삼각무역을 구상하는디, 여기서 장보고의 고향 완도가 부각되것다. 중국 산동으로 가는 뱃길, 명주로 직접 가는 뱃길, 또 일본 규슈로 가는 뱃길 한가운데 완도가 위치하고 있거든.
장보고가 상단 본부를 완도로 옮기는 계획을 세우는디, 여기에는 난관이 있어. 첫째, 해적들이 너무 많아, 둘째, 당시는 공(公)무역만 있고 사(私)무역이 금지되야 있어. 장보고가 완도 인근 해상세력을 규합하며 기회를 엿볼 적에, 신라 서라벌 내부에 진골 성골간 권력다툼이 심하더니 그 와중에 흥덕왕이 즉위를 했지. 서기 828년 장보고가 김우징이라는 왕족 도움으로 흥덕왕을 알현하러 서라벌로 들어갔것다. 시중 김우중이 아뢰는디, “산동상단 대행수(大行首) 장보고 입시(入侍)요.”
엇중모리
흥덕왕이 반기하여
“짐(朕)이 그대의 활약상을 익히 들어 아는바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기탄없이 말하라.”
장보고가 아뢰난디
“신(臣)이 당나라 각처를 두루 돌아 다녀보니
신라인들이 해적에 잡혀 노부(奴夫)로 팔리는바,
저에게 청해(靑海)를 지키는 책무를 맡겨 주신다면
해적들을 말끔히 청소(淸掃)하여
더 이상 신라의 양민을 노략(擄掠) 못하도록 하오리다.”
흥덕왕이 기뻐하며
“그대를 청해진(淸海鎭)의 대사(大使)로 임명하고
일만의 병력을 허(許)할 것이니,
해적들을 완전히 소탕하고 양민들 노예 매매를 근절토록 하라.”
대사라는 직책은 신라 정부에는 없는 관직, 파격적인 교지라.
좌우 신하들이 모두 깜짝 놀라는구나.
아니리 - 대사(大使)란 당나라 번진 절도사의 별칭으로, 청해진 대사이면 바다의 총독(總督) 지위라. 섬소년 궁복이였던 장보고가 흥덕왕의 특별한 배려로 고향 완도(莞島)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하여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하는디,
잦은모리
무엇보다 필요한 조건이 일만 군사의 동원이라.
기왕에 있던 군병들을 청해 진영에 귀속시키고
말목장에 사병(私兵)들도 휘하(麾下)에 소속시키고,
상단(商團)의 호위 무사들에게는 장교 역할을 부여하고
노예에서 풀려난 장정은 선봉 부대로 배치하고
선단(船團)의 목수와 기술자는 병선(兵船)을 제작케 하고,
상단의 장사아치들은 보급 부대를 맡게 하고,
완도 인근의 어부와 농부는 예비 병사로 편입하야
연마를 하게 하는디,
변화무쌍 검술이라 칼쓰기를 단련하고
천하무적 봉술이라 창쓰기를 훈련하고
백발백중 궁술이라 활쏘기를 수련하고
신출귀몰 마술이라, 이랴~ 말타기를 조련(調練)하니
어제의 오합지졸(烏合之卒)이 오늘의 정예 군사로
괄목상대(刮目相對), 성장을 하는구나.
엇모리
청해진 건설 첫 과업은 해적의 퇴치(退治)라.
해적을 퇴치할제,
해적들과 바다에서 직접 부딪칠 때는
바람을 등에 지고 불화살로 제압하라.
제갈량의 화공(火攻)이라.
해적의 뿌리를 뽑자며는 근거지를 없애야 할 터
해적들 소굴을 몰래 포위해서 한밤중에 급습하되
해적들도 본래는 한나라의 백성이니
가급적 살생을 피하고 해산토록 유도하라.
호랑이를 달래어서 산을 떠나게 만드는 조호리산 방책이요,
솥 밑의 장작을 꺼내어서 끓는 물을 식혀내는 부저추신 방책이라.
손자병법 이 아니냐.
항복한 해적은 살려 주어 양민으로 귀화시키니,
해적 퇴치라 하지마는
휩쓸어 모조리 없애버리는 소탕(掃蕩)이 아니라
품어서 모두를 살려내는 탕평(蕩平)의 방략이라.
과연 을지문덕의 지략에 비견할만한 명장(名將) 현장(賢將)의 지략인 바,
이렇듯 신라 서남해안 해적들을 완전히 평정(平定)하였더라.
아니리 – 투항해온 해적들 중 원하는 자는 받아들여 포용하니, 청해진 군영은 날랜 군사뿐 아니라 고급 선박 기술자, 운항 기술자를 저절로 확보한 셈... 그야말로 일석이조 양수겹장,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또 뭐 있더라? 그렇지, 뽕도 따고 임도 보고... 그건 그렇고, 청해진 해적 퇴치는 신라 대사 장보고와 당나라 절도사 설평이 국제적으로 공조(共助)한 세계 최초의 인터폴(Inter-Police) 활동이었것다. 이렇듯 해적 문제를 거뜬히 정리한 후 장보고가 이제 청해진에 본격적으로 군산복합 해상 국제무역기지를 건설하는디,
중중모리
청해진 군사들 주둔지는 장좌리가 제 격이라.
앞으로는 가리포로 큰 바다가 열려 있고
뒤로는 강진과 해남, 육지에 닿아 있는디,
노화도 보길도 소안도와 청산도 앞바다
물살의 흐름과 바람의 방향을 속속들이 알고 있고,
상왕봉에 올라 보면 동서남북 환히 트여
적선들 움직임이 손바닥 보듯 들어오니
수군 진지로 맞춤이라.
장좌리와 죽청리는 평야가 너른지라
군사 훈련에 더없이 좋고 야영에도 알맞고,
풍광 좋은 해안 지역은 무역 기지로 적합하다
장좌마을 건너 편에 조음도라는 작은 섬은
밀물 때는 섬이지만 썰물 때는 개펄이라.
하루에 두 차례 걸어서 건너가고 건너오고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있어 천혜의 요새로다.
장보고가 흔연히 영(令)을 내리는디
“청해진의 본영은 조음도에 둔다.”
대공사(大工事)를 시작하는구나
늦은중중모리
여엉차 (여엉차) / 여엉차 (여엉차)
어여차 저차아 으어허어 어허 (여엉차) / 청해진을 쌓자 (여엉차)
들어라 메어라 으어허어 어허 (여엉차) / 소낭구를 옮겨라 (여엉차)
기단을 쌓아라 으어허어 어허 (여엉차) / 판축을 세워라 (여엉차)
성벽을 올려라 으어허어 어허 (여엉차) / 장대를 지어라 (여엉차)
기둥을 심어라 으어허어 어허 (여엉차) / 목책이 다섰다 (여엉차)
말뚝을 박아라 으어허어 어허 (여엉차) / 부두가 다됐다 (여엉차)
물때가 돼간다 으어허어 어허 (여엉차) / 돛배가 들온다 (여엉차)
짐들을 부려라 으어허어 어허 (여엉차) / 조심조심 다뤄라 (여엉차)
목말라 죽것다 으어허어 어허 (여엉차) / 물한잔 마시자 (여엉차)
술도 한잔 마시자 (여엉차)
어여차 저차아 으어허어 어허 (여엉차) / 여엉차^ (여엉차^)
아니리 – 목책렬(木柵列)은 밀물 때 암초 구실을 해서 침입을 방지하는 방어용이고, 말뚝들은 부두(埠頭) 접안시설 하역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측을 하것다.
이처럼 청해진에 동아시아 최초의 군·산 복합 국제무역 기지(基地)를 건설해놓고, 기존 황해 횡단항로로는 적산 법화원을 여전히 연락본부로 삼으면서 마침내는 흑산도로 해서 제주 화원포 거쳐 당나라 명주까지 직행으로 오가는 동중국해 사단항로(斜斷航路)를 개척하니, 라(羅)· 당(唐)· 일(日) 3국은 물론 저 멀리 파사국과 대식국(페르시아하고 아라비아여), 인도양과 동남아 여러나라 온갖 진귀한 물건들을 교관선과 회역선에 가득 싣고 삼각무역(三角貿易) · 중개무역(仲介貿易)을 전개하는디,
진양조
범피중류 둥덩실 떠나간다.
망망한 창해이며 탕탕한 물결이라.
흰백색 갈매기는 붉은 돛으로 날아들고
떼지은 기러기는 이물 고물로 모여든다.
때마침 계절풍이 불어오니
큰 돛 두 개가 날개를 펴고 잔뜩 부풀어 바람을 머금는다.
가까운 바다는 밀물과 썰물 조류를 봐서 배를 띄우고
먼 데 바다는 강물처럼 흐르나니
난류 한류 길이 있어 해류를 타고 나아간다.
한낮에는 해를 보고 밤중에는 달과 별을 바라보며 방향을 잡으니
이른바 천문항법이요,
바다 가운데 물색의 차이와 파도 크기로 육지와의 거리를 짐작하니
일컬어 수문항법이라.
동중국해를 빗겨 질러 깊은 바다 물빛을 보니
검은 색 들어있어 흑조대(黑潮帶)가 분명쿠나.
신라 선원들 재조 봐라,
역풍에도 돛기술 발휘해서 지그재그로 나아갈제
이때여 먹구름 가득 몰려오더니
순식간에 달과 별을 가린지라,
자석 바늘 급히 꺼내 동서남북 사방을 분간(分揀)하니
신라 사람이 만든 침반, 라침반이라 일렀더라.
중모리
이윽고 섬들이 나타나니 주산군도가 예로구나.
인근에 암초가 숨어 있어 까딱하다 좌초할라,
조심조심 배를 몰아 드디어 명주항에 도착한다.
신라에서 가져온 갖가지 귀중품들 잔뜩 풀어 내려놓고,
월주로 올라가서 품질 좋은 도자기 보난대로 사들이고,
진귀한 남방 박래 호사품들 몽땅 쓸어 왕창 실고
보타도 관음상 앞에서 남무아미타불 지극 불공 드릴 적에,
때마침 동남풍이라.
순풍에 돛을 달고 흑조대 해류 올라타
동중국해 다시 빗겨 질러 밤낮 없이 흘러가니
불과 나흘만에 제주도 한라산이라.
흑산도 칠락산 목포의 유달산 멀리 바라보며
동으로 방향을 살짝 트니
좌편은 해남 달마산이요 우편은 완도 상왕봉이라.
청해진으로 돌아와서 짐을 내리고 실고 부린 후에
닻 감고 돛을 올려
다도해 연안을 요리조리 빠져나가
대마도 건너 일본 규슈 하까다 항에 당도하니,
라(羅) 당(唐) 일(日) 삼국의 국제 중개무역이
이로 해서 완성된다.
아니리 – 아무리 사나운 풍랑에도 장보고 선단은 무사 안전하기로 소문났지. 신라 사공들 배짱과 솜씨가 유럽의 저 유명한 해적 바이킹보다 뛰어났거든. 이처럼 장보고는 당시 누구도 그 가치를 알지 못했던 대양(大洋)으로 진출, 동북아 해상권과 무역권을 제패하고 해상왕국을 건설했거날,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장보고의 아들과 왕이 된 김우징 딸과의 혼사문제가 빌미가 되어 혼탁한 신라 말기 권력다툼에 휩쓸리게 되는 바,
창조(唱調) - 오호 통재라. 염장이라는 자객에게 피살되고 말았구나. 온나라 백성들 평화롭게 함께 잘사는 세상 만들고자 했던 해상왕 장보고의 원대한 포부가 일순간에 허사가 되었구나.
아니리 - 장보고 사후 10년만인 851년, 청해진은 완전 철폐되고 완도 사람들은 전부 김제 벽골제로 강제 이주되었지. 장보고 반골세력의 뿌리를 뽑아버린 극악한 조처라. 허나 강제로 탄압한다고 백성들 삶이 어찌 뿌리 뽑히리오. 장보고의 후예인 해상세력들은 불과 몇십년 후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이바지하였고, 또 그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임진왜란 때 해양 수호의 성웅 이순신 장군을 보위하여 흉악한 왜적을 물리친 남해안 어민들이 바로 그 후예들인즉, 해상왕 장보고는 결코 죽지 않고 면면히 살아 내려온 것이렷다.
엇중모리
장보고 누굴런가
바다로 진출하여 해적을 퇴치하고
무역권을 제패한 해상왕국의 건설자라.
해외 동포를 결집시켜 자치권을 확보하고
민족의 저력을 발현시킨 혜안 있는 지도자라.
어화 세상 사람들아 이내 한말 들어 보소
오대양 육대주 온 세계를 누비는
도전정신 개척정신 모두 함께 발휘하고,
세계 각국 재외 동포 네트워킹 완성해서
경제 영토는 물론이요 문화 영토를 확장하세.
세계인 장보고 그 정신을 일으키세.
한반도와 세계 만방 우리 겨레 후손들에
풍요로운 미래 열어를 주세.
함께 열어를 가세